최근에 나온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의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이라는 책은 감동적이다. 아니 '감동'보다는 '죄의식'을 갖게 만든다. 그의 처절한 옥중 서한 앞에서는 70년대를 무난하게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1971년의 4·27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지르고서도 투표 결과에서 밀리면 선거판을 뒤엎기 위한 용도로 이른바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 냈다. 물론 완전 조작된 사건이었다.
재일동포로 당시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서준식 형제가 그 공작의 희생양이 되었다.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복역기간 중인 19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에 소급 적용 당해 모두 4차례에 걸친 보안감호 처분으로 계속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게 된 건 17년 1개월만인 1988년 5월이었다. 조작된 죄목으로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나이 40세가 넘어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있어서 사악했을 뿐만 아니라 교활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인사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선 일단 법정에서 크게 때려놓고 일찍 다 풀어줬다. 그러나 무명 인사들의 경우엔 무조건 '간첩'으로 몰아 민주화 운동 진영과 차단시키면서 '박멸'하는 수법을 썼다.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과 관련하여 8명을 사형시킨 '사법 살인'을 저지른 것도 바로 그런 수법의 결과였다.
박 정권은 일제가 독립군들을 상대로 가한 고문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극악한 고문 수법을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심지어 여당의 중진 의원들까지 고문을 당했다. 인혁당 사건의 경우 고문이 어찌나 잔인했는지 시체를 가족에게조차 보여주지 않고 시신을 탈취해 화장을 해버렸다. 고문이 너무도 악독해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들, 미쳐버린 사람들, 한국을 저주하며 외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고문을 하는 인간 사냥꾼들은 집에 가선 자상한 아빠와 남편 노릇을 했다. 이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의 주동자였던 유인태씨와 이철씨가 도피 중 경찰에 붙잡힌 사연도 눈물겹다. 잘 아는 친구와 지인(知人)이 신고를 했다. 신고하지 않으면 그들도 크게 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 먹고 정부를 비판하는 말 한마디만 해도 어느 새 신고가 이루어져 감옥에 갇혀야 했던 세상이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가? 박 정권 시절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예찬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의 인성이 파괴된 게 바로 그 시절이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의와 신뢰는 공권력에 의해 압살되면서 한국인은 '경제 동물'이 되었다. 한국사회는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서준식 옥중서한을 읽으면서 참회의 시간을 가져보자.
/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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