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현실화하고 있는 정몽준 의원의 대통령선거 출마는 정치권 못지않게 재계에도 초미 관심사다. 재계 서열 13위인 현대중공업 그룹의 오너인 그의 대선출마는 돈과 권력, 특히 재벌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재계로선 정경분리 원칙이 시험대에 오르는 부담을 안게 되고, 10년 전 창업주의 대권 도전 경험이 있는 현대가(家)는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승패에 따라 기업간 이해관계도 미묘해져, 정 의원 행보에 재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부는 鄭風… 현대家 "政風" 휘말리나
●기업인 정몽준과 현대중공업
정 의원은 선친 정주영 명예회장의 배려로 1975년 현대중공업과 인연을 맺으며 기업인이 됐다. 80년 상무, 82년 사장, 87년 회장을 맡았고,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89년 이후에는 줄곧 고문 직함만 갖고 있다. 그러나 지분구조상 올 2월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현대중공업 그룹을 지배하는 오너이다. 다만 경영 전반을 전문경영진에 맡기고, 중요 현안만 직접 챙기는 '원격경영'을 택하고 있다.
그가 지분 11%를 보유해 최대 주주인 현대중공업은 현대미포조선 삼호중공업 현대기업금융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고, 현대기업금융은 현대기술투자와 현대선물의 최대주주. 이렇게 6개 기업으로 짜여진 현대중공업 그룹의 자산총액은 11조8,941억원, 대기업 순위는 대한주택공사에 이은 13위로 현대 및 금호그룹보다 앞선다.
●긴장하는 현대가
정 의원의 대선출마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현대 등 현대가(家)가 모여 있는 계동사옥의 인사들은 되도록 말수를 줄이고 있다. 14,15층 서울사무소에 재정·홍보 파트를 두고 있는 현대중공업은 '모르쇠'에 가까울 만큼 입조심을 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우리는 아는 것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며 정 의원 행보에 회사가 거론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한다. 정 의원도 이를 의식해 요즘 계동 사옥 이발소에는 들려도 회사에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정의원의 출마를 바라보는 재계의 시선은 대체로 곱지 않다. 한 기업 인사는 "재벌이 출마해 망가지는 것을 다시 보기는 싫고, 또 정 의원이 당선돼도 피는 물보다 진한 만큼 재벌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힐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 기업 다시 정치에 휘말리나
정 의원이 대선에 출마하더라도 과거처럼 현대중공업 그룹으로부터 자금·인력 지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장에서 용납도 되지 않을 뿐더러, 마치 섶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라 정 의원에게도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또 현대가로선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 의원의 위상도 다르고, '왕자의 난' 이후 형제 갈등의 골도 메워지지 않아 여력이 없는 상황이다. 정 명예회장이 핵심 선거조직으로 동원한 현대차써비스 같은 전국적 조직망이 정 의원에게는 없는 점도 큰 차이다. 현대중공업 직원 2만7,000여명은 서울에 500여명이 근무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울산 본사에 있다. 다만 현대중공업에는 과거 국민당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있고, 축구협회에도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정 의원이 2월 공직자 윤리위원회에 신고한 총재산은 국회의원 중 가장 많은 1,718억4,400만원으로 1년 전에 비해선 정주영 명예회장이 물려준 토지, 주식, 현금 등 60억원과 현대중공업의 주가상승으로 683억9,381만원이 증가했다. 대선에 출마하더라도 스스로 선거비용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정 의원에게 별도 지급되는 돈은 없으며, 지난 해에는 배당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정의원 기업과 차단막 쌓아야
현대 안팎에선 정 의원이 대선출마 선언 이전에 현대중공업 등 현대가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사전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고문직 사퇴, 지분매각, 의결권 제한, 위탁경영, 블라인드 트러스트(재산의 백지위임) 등 다양한 방법이 거론되고 있으나, 정 의원측은 "결정된 것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L'투자증권 송재학 애널리스트는 "현대중공업은 해외 선박회사들을 상대로 영업을 해 선거가 경영에 타격을 줄 사안은 아니지만 회사 이미지에는 좋을 리 없다"며 "정 의원은 기업인의 위치를 먼저 정리한 다음 대선에 출마해야 기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현대重노조 "대선출마 반대" /정몽준 측"현대 이용안해"
정몽준 의원이 '대선 프로그램'을 착착 진행시키며 출마선언에 성큼 다가가자 현대중공업 노조는 23일 '정몽준 의원의 대선출마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 "현대중공업 고문이자 최대주주인 정 의원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회사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출마했을 때처럼 또다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대중 노조는 또 "최근 중공업 주가가 하락한 것도 정 의원의 대선출마설에 의구심을 가진 투자자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며 "대선에 출마하려면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중공업 지분을 처분해 회사를 자유롭게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몽준 의원실은 24일 '현대중공업 노조 성명에 대한 입장'이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정 의원은 정치입문 후 현대중공업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일임해왔고 이번 대선에 출마하더라도 현대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면서 "정 의원은 혁명적 정치변화와 깨끗한 정치구현을 위해 선거법을 100% 준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의원측은 또 "현대중공업 노조 집행부가 현재 유고상태인데 어떻게 노조 명의의 성명이 나왔는지 의문"이라며 "민주노총의 지지를 받는 한 정당도 대선후보를 낼 예정인데 이번 성명이 이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고 주장했다.
■정주영 前회장 낙선뒤 현대 혹독한 시련 겪어
현대자동차 정몽구(鄭夢九) 회장은 7월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동생인 정몽준 의원의 대선 출마와 관련된 구설을 피하기 위해서다. 정 회장은 이미 한 차례의 설화를 겪은 바 있다. 7월초 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을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정몽준 의원이)대통령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정 회장을 비롯해 과거 현대그룹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은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명예회장의 92년 대선 출마로 인해 초래됐던 풍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정 전 회장은 "기업을 괴롭히는 지긋지긋한 정치 현실을 뜯어고치겠다"며 국민당을 창당, 대선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당시 현대자동차에 근무했던 박모(43)씨는 "당시 현대의 분위기는 '왕회장'(정 전회장)이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하면 별을 딸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어떤 방법으로 딸 수 있는지를 찾아내야만 했다"며 "현대그룹 전체가 '하늘의 별'(대통령 자리)을 따기 위해 총동원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이 대선에 차출한 현대그룹 직원은 당직자 50여명 등 중앙당사 270여명, 지구당 간부 250여명 등 모두 52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선거운동기간 대다수 현대그룹 임직원들은 며칠씩 휴가를 내 연고지에서 '귀향 득표활동'을 펴야만 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은 '현대당'이라는 딱지가 붙게 됐고, 현대그룹 임직원들은 자의반 타의반 '현대당원'이 돼야 했다. 정 전 회장이 현대중공업에서만 조달한 비자금이 500여억원에 달했다는 사실은 천문학적인 돈이 뿌려졌음을 시사한다. 그 자금이 대부분 현대그룹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대선 낙선의 고배는 정 전 회장한테만 돌아가지 않았다. 현대그룹도 쓰디쓴 잔을 받아야만 했다. 낙선 뒤 정 전회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그룹 부회장이 옥고를 치르고, 측근들은 도피하는 신세가 됐다. 정 전 회장은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까지 받아야 했다. 대선 패배 뒤 현대그룹 임직원중 구속자 13명, 사전구속 영장 발부자 8명, 수배자 27명, 불구속 입건 23명, 소환자 19명 등 사법처리 대상자가 속출했다.
현대계열사들은 금융제재로 자금줄이 막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산업은행을 필두로 상당수 금융기관들이 현대건설 등 13개 계열사에 대해 자금압박을 가했고, 일부 계열사의 경우 휴폐업설이 나돌기도 했다. 당시 재계에서 "현대그룹쯤 되니까 견디지 웬만한 그룹이었으면 무너졌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현대 관계자는 "출마와 낙선에 따른 '기회 비용'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억 때문에 과거 현대그룹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정몽준 의원이 출마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고, 법인 차원에서 지원은 물론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에서 기업이 오너의 정치활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지는 그들도 자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윤순환기자 goodm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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