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민정 이양 촉구 기자회견(1961년 6월3일)과 관련한 필화 사건은 이제 막 정력적인 기자 생활에 빠져들던 내게 간단치 않은 시련이었다. 좁은 감방 속에 갇힌 몸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자유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속도 시커멓게 타 들어갔다.그러나 한편으로 이 필화 사건은 내가 더 올곧은 언론인으로 거듭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나는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고초를 겪는구나”라는 생각에 시대를 원망하면서도, “진실 보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언론의 가치이자 소명”임을 새삼 되새겼다.
내가 체포된 지 사흘 뒤인 6일에는 이진희(李振羲ㆍ전 문공부장관) 기자가 제 발로 시경을 찾아왔다. 이 기자는 “다 내가 했고, 이만섭 선배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견습기자는 기사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었는데 참 의리도 있고 용기도 있는 좋은 후배였다.
8일 김영상(金永上) 편집국장은 석방됐지만 나와 이진희 기자는 결국 13일 오후 구속이 최종 결정돼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서빙고의 육군 형무소로 이감됐다.
이감 될 때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수갑을 손에 찬 채 지프차로 옮겨지면서 나는 호송관에게 “이왕이면 동아일보에 가서 인사나 하고 갑시다”고 말했다. 그냥 흘리는 말로 얘기했음에도 날 태운 지프는 동아일보로 갔다. 동아일보사 건물 앞에는 소식을 듣고 동료, 선ㆍ후배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수갑 찬 손을 잡으며 “곧 다시 돌아올 테니 조금만 고생해라”며 나를 격려했다.
아내는 육군 형무소로 거의 매일 면회를 왔다. 하루는 나는 아내에게 “조병옥(趙炳玉) 박사 사모님에게 가서 이 억울한 사정을 말해 주오”라고 당부했다. 노정면(盧禎冕) 여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시킨 대로 노 여사을 찾아가 간청을 했다. 조 박사 못지않게 나를 좋아했던 노 여사는 아내를 만난 뒤 윤보선 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찾아갔다. 노 여사는 항의 반 애원 반으로 윤보선 대통령에게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는 별도로 동료 기자들도 나의 석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법조 출입기자였던 박현태(朴鉉兌) 기자, 국방부 출입기자였던 최원각(崔元珏) 기자는 회사와 상의, 혁명군과 가까운 사이인 신직수(申稙秀ㆍ후일 중앙정보부장)씨를 동화일보 필화사건 변호사로 위촉하기까지 했다.
신 변호사는 혁명군과의 화해 방법의 하나로 해명 기사를 써 주길 바랐다. 하루는 고재욱(高在旭) 주필과 김성열(金聖悅) 부장이 면회를 와 이렇게 말했다. “신직수 변호사 말로는 이번에 문제가 된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해명 기사를 내기만 하면 석방시켜 준다는 데….”
나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감옥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언론의 권위를 위해 군법회의에서 진실을 정정당당하게 밝힐 작정입니다. 그러니 행여 해명기사를 실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감옥살이를 한 뒤 두어 달 지난 8월초 어느날 새벽이었다. 최고회의 공보실장 원충연(元忠淵) 대령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기소유예가 결정됐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기뻐할 새도 없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니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타고 온 지프에 날 태우더니 우리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와 장모는 나를 버선발로 맞았다. 난 아무 말 없이 장모가 건네주는 하얀 두부를 받아먹었다.
후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노정면 여사의 요청을 받은 윤보선 대통령이 나의 석방에 큰 힘이 됐다. 이는 윤보선 대통령의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도 나온다. 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찾던 윤 대통령은 8월말 서울 외곽 지역 교외선을 박정희(朴正熙) 의장과 함께 타게 됐는 데 그 자리서 박 의장에게 석방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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