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북한 탈출보다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사선(死線)을 넘어 풍요와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의 이방인으로 겉돌고 있다. 탈북자가 매년 급증하고 있지만 상당수는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채 생활고와 문화충격에 허우적거리거나 범죄에 노출되는가 하면 끝내 한국을 떠나기까지 한다.
‘새 빈민층은 탈북자’1999년 1월 남편(37)과 함께 서울 땅을 밟은 탈북자 이모(34ㆍ여)씨. 입국 당시 가슴에 담았던 단란하고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사기를 당해 정착금 3,000여 만원을 날려버린 그는 잦은 부부싸움 끝에 지난달 이혼했다. 식당 허드렛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그는 “이렇게 살려고 목숨을 걸고 왔는지 회의가 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2000년 입국, 공사장 노동일을 하지만 몸이 허약해 노는 날이 많은 정모(37)씨도 “아이들 교육은 차지하고 먹고 사는 게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심지어 생활고로 빚에 억눌린 탈북 여성이 제 발로 사창가를 찾아갔다거나 어느 주점에서는 탈북 여성이 접대부로 나온다는 등 믿기 어려운 말들까지 들려오는 실정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탈북자 가정의 월 평균소득은 110만원. 실업률도 40%를 넘는다. 상당수가 실업자이거나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한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한의사가 되거나 요식업으로 큰 돈을 번 탈북자에 대한 보도가 나오지만 보통 탈북자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문화충격ㆍ범죄노출 99년 단신 탈북한 김모(32)씨는 “능력과 경쟁을 최우선시 하는 조직문화, 성을 사고파는 향락문화, 돈이 지배하는 금권사회 등 모든 게 충격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월급 170만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김씨는 그나마 적응을 잘하고 있는 편. 적응 실패 끝에 범죄에 빠지는 탈북자가 적지 않다. 남한 여성 2명과 교제했으나 탈북자라는 이유 때문에 결혼에 거듭 실패한 임모(34ㆍ2000년 탈북)씨는 지난해 가출 10대 여학생들과 성매매를 하다가 교도소신세를 졌다.
94년 입국한 최모(41)씨는 정착금을 탕진하고 부랑생활을 하다 2000년 12월 수원지법 여주지원 농협출장소의 금고를 털었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한국을 떠나는 탈북자들 한국사회에서의 적응실패와 소외로 또다시 ‘탈출’을 택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4년 동안 유통업을 하며 돈을 꽤 모은 탈북자 이모(41)씨는 최근 미국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탈북자라는 꼬리표에 뒤따라 다니는 주변의 멸시와 아들이 탈북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있기 때문. 그는 “고칠 수 없는 말투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푸대접”이라며 “탈북자는 천민계급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을 떠나 미국, 중국 등으로 이민을 간 탈북자는 33명. 한 당국자는 “최근 들어 이민을 희망하는 탈북자가 급증하고 있어 이민 탈북자 수는 더욱 늘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이사장 윤현ㆍ尹玄 목사) 이기찬(李基讚) 간사는 “탈북자를 신 빈민층으로 방치하고 한국인과 다른 하류계급으로 멸시하고 대우한다면 우리 사회는 언젠가는 엄청난 홍역을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전문가 의견/창업지원등 자립형 정책 전환을
“물질적 지원에서 자립형 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때 입니다.”
전문가들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는 국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서는 정책의 대변화가 필요하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국내 입국 후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경기 안성시)에서 2개월의 교육을 시킨 뒤 일정액의 정착금을 줘서 사회로 내보내는 정책으로는 사회주의에 길들여진 탈북자들이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텨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자립하게 하려면 정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질적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화여대 북한학과 강사인 박현선(朴炫宣ㆍ여) 박사는 “탈북자가 늘어나는 추세에 비추어볼 때 현재 지급되는 초기 정착금 지원 규모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정부 주도보다는 민간단체의 참여를 활성화해 교육ㆍ훈련을 통한 취학이나 취업 형태의 자립과 자활을 목표로 탈북자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공공시설의 식료품, 사무용품, 신문 등 일상생활용품 판매를 위한 매점 운영 등의 사업권 기회를 확대하고 ‘생계형 창업지원 제도’를 현실화해 자영업을 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탈북자가족상담 코너를 별도로 만들어 법률 자문을 해준다든지 NGO의 경우도 기존 활동에 탈북자를 위한 역할을 추가하면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 스스로 정착 의지를 키울 수 있도록 일률적으로 지급되고 있는 국내 정착금도 차별화하거나 선별 지급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길수군가족돕기운동본부 공동대표인 고려대 북한학과 김동규(金東圭) 교수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책을 제시했다. 정부가 나서 일정한 지역에 집단 자활촌을 만들어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익힌 기술 등을 활용해 만든 생산품을 국가가 사주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와 함께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가 탈북자 문제를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가족단위로 탈북자 가족과 자매결연을 맺어 어려움을 나누거나 중고생들이 봉사활동으로 탈북자 자녀들에게 무료과외를 시켜주는 것도 탈북자들이 이 땅에 빨리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北관련 NGO근무 이주일씨/인정받던 생명공학자 받아주는데 없어
“그렇게 좋아하던 생물학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탈북자에게는 사치입니까?”
북한에서 12년간 생명공학자로 일해온 이주일(李主日ㆍ37ㆍ서울 양천구 신정동)씨는 요즘 자신의 전공분야와는 관계없는 북한관련 NGO단체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에 와서 40곳이 넘는 바이오벤처에 원서를 냈지만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는 북에서 상당히 인정 받는 생물학자였다. 체르노빌 사태로 러시아의 식용달팽이 공급이 떨어져 세계적으로 달팽이 값이 올랐던 상황에서는, 수입증대를 노린 정부의 지시로 프랑스달팽이 연구에 나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전문용어가 다르고, 실험기기나 기계의 수준차이 빼고는 북에서나 남에서나 결국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는 데도 탈북자에게는 장벽이 훨씬 높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에 온 것은 2000년 7월. 평남 평성에서 생명공학연구원으로 일했으나 끼니도 제대로 때울 수 없어 97년 부인과 6살 난 아들을 뒤로 하고 식량과 돈을 벌어 오기 위해 기약 없이 두만강을 건넜다.
곧바로 중국 국경경비대에 붙들린 후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밀입국 사실이 북한에도 통보되는 바람에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렇게 중국에서 벌목과 담배따기 등으로 3년간 돈벌이를 하다 결국 한국행을 감행한 것.
국내에 들어온 그는 전북대 교수와 뜻이 맞아 한 때 학내 바이오벤처 연구원으로 잠시 일하기도 했으나 사정상 서울로 거처를 옮기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그는 “당시 전공분야의 다른 직장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만둔 것이 못내 후회가 된다”고 했다.
“한국에 온 탈북자 가운데 고급인력도 많지만 결국 내몰리는 곳은 3D업종”이라고 지적한 그는 탈북자 재교육 시스템이 하루 빨리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