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글과 책] ‘발문가’ 이문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글과 책] ‘발문가’ 이문재

입력
2002.08.21 00:00
0 0

책에서 본문을 제외한 제목, 차례, 서문, 발문, 헌사, 판권 난 같은 종속적 부분을 유럽의 한 비평가는 ‘파라텍스트’라고 불렀다.그리고 그 ‘파라텍스트’를 한국의 한 비평가는 ‘곁다리텍스트’라고 번역했다. 그러니까 문학책에 흔히 붙어있는 발문은 일종의 곁다리다. 그것은 대개 본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붙어 있지만, 본문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 주객을 뒤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인 이문재씨는 문단에서 ‘발문가(跋文家)’라는 농을 많이 듣는다. 동업자들의 책 뒷부분에서 그의 글이 자주, 그것도 너무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언제 그 많은 시집 교정지들을 다 읽고 짧지 않은 발문을 쓸까 싶을 정도로 그의 발문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이문재씨가 ‘발문가’가 된 것이 그가 단지 바지런해서라거나 글 욕심이 많아서는 아닐 것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너무 마음이 여려서일 것이다. 이문재씨는 발문 청탁을 거절할 만큼 마음이 모질지 못한 것이다.

‘해설’이라는 내용 중심의 이름을 붙였든, ‘발문’이라는 체제 중심의 이름을 붙였든, 책 뒤에 붙는 글은 아무래도 본문의 장점을 들추고 단점을 감싸는 ‘주례사’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과잉해석은 주례사가 피할 수 없는 덫이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주례사의 본질이다.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의 연원은 미술계다. 전시회 팸플릿에 실리는 미술평론가들의 글이 예외 없이 찬사로 그득한 데서 생긴 말이다. 그러니까 ‘주례사 비평’은 부정적 함의가 짙은 말이다. 언제부턴가 이 말이 문학평론계에도 수입되었다.

문예지에 실리는 평문도 주례사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발문의 형식을 한 평문은 그런 위험에 노출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러니까 ‘발문가’ 이문재씨는 엉겁결에 직업적 주례가 된 셈이다.

기자는 이문재씨가 동업자들에게 헌정하는 주례사가 늘 좋지만은 않다. 그러나 좋지 않은 주례사까지를 포함해서, 이문재씨의 발문을 읽고 나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의 글에도 물론 ‘과잉해석’은 있지만, 그 과잉해석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따스한 마음의 진솔한 표현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김용택씨의 최근 시집 ‘연애시집’(마음산책 발행) 뒤에 붙은 이문재씨의 발문 ‘섬진강에 내리는 산그늘에게’를 읽으며 기자는 다시 한번 마음이 푸근해졌다.

섬진강의 ‘섬진’을 ‘섬을 등에 짊어진’으로 번역하겠다는 유쾌한 ‘억지’로 시작한 이 발문에서, 찰진 문체에 실린 ‘발문가’의 따스한 눈길은 ‘주례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 너머의 자연으로 가 닿는다.

이문재씨에 따르면,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의인화는 문명화의 핵심 추진력이었지만, 이제 생명을 옹호하는 진정한 시인이라면 역의인화를 화두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이문재씨의 발문이 아니라면, ‘연애시집’의 독후감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 발문은 오만방자하게도 곁다리의 처지를 넘어서서 본문과 함께 이 시집의 양다리를 이루고 있다.

/이문재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