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헌 변협회장 인터뷰요즘 변호사들은 누구나 정체성의 위기를 얘기한다. 변호사들에게 사회적, 법률적 약자의 구제는 여전한 도덕적 의무지만 법조인력의 급팽창으로 인한 치열한 생존경쟁은 엄연한 현실이다.
19일의 대한변호사협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만난 정재헌(鄭在憲·사진) 변협회장은 “그러나 현실이 어떻든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수호 정신은 시대를 초월해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변협 50주년을 맞은 소감은.
“어려운 시기를 지켜온 선배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변협이 사회의 위기 때마다 올곧은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음을 자부한다. 1987년 이래 매년 인권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노력의 결과로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발족한 것도 한 예다.”
- 민주화 이후 인권에 대한 절박성이 완화하면서 변협의 위상도 위축된 감이 있다. 새로운 방향 모색이 필요한 시점 아닌가.
“국가가 인권을 보호하는 시대가 됐지만 그늘은 있다. 얼마 전 역대 회장모임에서도 외국인 근로자, 중국동포, 탈북자 등 소외계층에 활동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 지난해 2월 취임 때 변호사가 ‘법률상인(商人)’으로 전락한 시대조류를 개탄했다. 변호사가 여전히 존경을 받을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나.
“한해 법조인 1,000명이 배출되는 시대에 공익성만 강조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변호사들이 공익활동을 많이하는 때도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형사사건 50건 중 많아야 7~8건에 불과하던 국선변호사 수임이 30건 이상으로 늘었다.
법률선진국에서는 단 10분을 상담해도 자문료를 받지만 우린 그런 개념이 없다. 무료 법률자문도 공익활동이다. 변호사법에 변호사의 공익의무를 규정한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 각종 조사에서 변호사는 여전히 최고소득 직업인데.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심하다. 친한 변호사가 ‘연수원 졸업생을 쓰려면 월급을 얼마나 줘야 하느냐’고 묻길래 400~500만원을 얘기했더니 ‘그런 곳이면 내가 가겠다’고 하더라.”
- 사법고시 합격생수가 계속 느는데다 법률시장 개방도 앞두고 있다.
“법률시장 개방이 예상되는 2004년엔 변협회원이 6,000명에 달한다. 변호사들이 관계나 언론사, 일반기업에도 진출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법치주의가 확립돼야 변호사의 활동공간이 생겨난다. 우리나라는 헌법 위에 ‘국민정서법’, 그 위에 ‘떼법’이 있다는 얘기도 있지 않느냐.”
- 비법대(非法大) 출신, 혹은 재조(在曹) 경력없이 변호사가 되는 경우도 늘고 있는데.
“법의식이 사법연수원 2년에 길러지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사법부나 검찰에서 선배로부터 배우는 기회없이 곧바로 개업하는 이들은 직업적 사명에 대한 성찰 등 뼈를 깎는 자기수양이 있어야 한다.”
- 97년과 99년 법조비리 이후 자정노력의 결과는.
“변호사법 개정으로 영구제명제도가 생겨났다. 변협이 문제 변호사에 대해 징계의견을 내면 독립된 징계위원회가 처리, 지금까지 여럿이 징계를 받았다. 구조적인 사건수임 비리는 거의 근절되었다고 본다.”
◇프로필
▲1932년 서울
▲경기고 서울대법대
▲고시 사법과 13회
▲서울·제주지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노원명기자narzis@hk.co.kr
■수치로 본 변협/ 변호사 5,000명 넘어…여성회원 237명 등록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280명에 불과했던 변호사수는 1981년 처음으로 1,000명 선을 돌파한 이후 급증, 올해 3월 드디어 변호사 5,000명 시대가 열렸다.
90년대 중반이후 변호사수의 급증은 사법시험 합격자수가 대폭 늘어난 데 기인한다.
94년 한해 290명에 불과했던 합격자수는 정부의 법조인력 양산 정책에 따라 매년 100명 꼴로 늘어나 지난해 합격자수는 991명에 달했다.
이 기간 여성의 변호사 진출도 주목할 만하다.
최초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李兌榮) 변호사는 54년부터 74년까지 20년간 한국 유일의 여성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89년 처음 10명을 넘어선 여성 변호사수는 90년대 들어 가파르게 늘어나 올해 7월 현재 237명이 등록돼 있다.
단독개업이 일반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로펌에 취업하는 변호사가 늘어난 것도 최근의 현상. 97년 117개였던 법무법인 수는 IMF이후 기업구조조정 특수를 누리며 급성장, 지난해에는 203개까지 늘어나는 등 매년 평균 23개씩의 로펌이 새로 생겨나는 추세다.
소속변호사수도 97년 769명에서 지난해 1,636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저연령화도 두드러진다.
83년 당시 50대가 23%, 60대가 31%로 장·노년층이 업계의 주축을 이뤘으나 2000년에는 30대와 40대가 각 28%와 38%를 차지, 소장층이 주류를 점했다. 또 과거에는 사법부와 검찰 등 재조(在曹) 출신의 변호사가 다수였으나 현재는 전체 변호사의 68%가 재조 경험이 없다.
/박진석기자
■변협 영욕의 역사/ 1987년 호헌반대 '6월항쟁' 물꼬
변협의 지난 50년 역사 속에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영광의 역사, 그리고 소속 회원의 비리로 인해 여론의 심판대에 서야 했던 오욕의 역사가 공존한다.
변협은 1952년 7월28일 피난처인 부산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53년 12월 개최된 최초의 전국변호사대회에서 변협은 결의문 채택을 통해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근본정신을 처음으로 표방했다.
변협이 단순한 직업단체 성격을 넘어 여론을 주도하는 단체로까지 자리 매김된 것은 5·16 군사혁명 이후 군부독재에 대한 준엄한 비판자 기능을 자임하고 나서면서부터.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76년7월 변협은 구속영장 남발방지와 보석제도 운영확대, 피의자 접견권 보장 등을 촉구하고 나섰다.
79년 부마사태 당시에는 현지조사단 파견과 함께 구속자 무료변호에 나서기도 했다.
80년대는 변협의 비판기능이 정점에 달한 시기다. 87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호헌(護憲) 발표가 있은 직후 반대성명을 발표, 이후 ‘6월 시민항쟁’으로 이어지는 물꼬를 텄는가 하면 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의문사’ 특별조사단을 구성, 사건진상규명에 나섰고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85년 ‘민청련 김근태 의장 고문사건’ 때도 진상규명과 가해자 사법처리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변협내 소장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88.5)’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다. 민주화 이후 각종 시민단체가 출현하면서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줄어든 변협은 97년 10월 이른바 ‘의정부 법조비리’와 99년 1월 ‘대전 법조비리’ 사건을 겪으며 창립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변호사의 공익적 지위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이 사건은 결국 2000년 1월 수임장부작성 및 보관의무, 연고관계선전금지, 변호사가 아닌 사람과의 제휴금지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변호사법 개정으로 귀결됐다.
99년 ‘옷로비의혹 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 등에 역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가 도입되면서 변협은 위상회복의 전기를 맞게 된다.
변협은 99년 10월 양 사건에 최병모(崔炳模) 강원일(姜原一) 변호사를 특별검사로 각각 추천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변협이 추천한 차정일(車正一) 특검이 ‘이용호게이트’ 수사를 맡아 유례없는 국민의 성원과 지지속에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개가를 올렸다.
노원명기자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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