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용민족의 비극인 6ㆍ25 전란 후의 우리 사회는 너무도 가난했다. 의식주 가운데 무엇 하나 넉넉하지 못했다. 우리 집 식구는 아홉인데 방은 두 개, 그래서 형제들끼리 둘씩 혹은 셋씩 같은 요와 이불 속에서 함께 자야 했다.
그런 가운데 난 여섯 살 위인 누나와 같이 잤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누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공장을 다녔다. 누나는 공장에서 지친 몸을 끌고 집에 와 밤늦게까지 이불 속에 엎드려 책을 읽곤 하였다. 옆에 나란히 엎드려서 나도 그 책을 함께 따라 읽었다.
불균형이었다. 읽는 속도가 크게 차이날 수밖에 없었고, 보는 책의 수준도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첫째 문제는 차차 해소가 되었다. 나의 독서 속도가 엄청나게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문제는 끝내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나는 뜻도 모르고 그냥 속도를 내어 따라 읽었다. 그 당시 한국문학전집을 대부분 읽었고 또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책들도 꽤나 많이 읽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읽었는지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후에 어떤 책을 읽어보면 어딘지 낯익다고 생각이 들곤 하는데, 그 책이 아마도 그 때 읽었던 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읽었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예외적으로 항상 기억나는 책이다.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 허생원이 애송이 장돌뱅이 동이를 야단쳤는데 결국은 발을 다쳐 동이의 등에 업혀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지난 세월 이야기, 이제는 나이 든 방랑자가 혹 아들일지도 모르는 젊은이의 넓은 등에 업혀서, 함께 머무르게 될 수도 있는 곳을 함께 찾아가는 이야기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다.
신부 생활 30년에 접어들면서 아직도 ‘메밀꽃 필 무렵’의 느낌이 가슴 속에 살아 있다면 혹자는 ‘평생 독신으로 사는 신부가 왜 밖에서 낳은 자식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일까’하는 별난 상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엔 방랑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다. 그런 경향이 자연스럽게 ‘음악을 하는 신부’라는 외도를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한번 받은 감동이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지정할 수도 있는 것인지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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