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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2)시인 이성부/山에서 다시 만난 詩는 내게 삶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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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2)시인 이성부/山에서 다시 만난 詩는 내게 삶을 보여주었다

입력
2002.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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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내가 만났던 좋은 시들은 내 정신의 키를 자꾸만 높여 주었습니다. 나는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이 볼 수 없는 먼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그래서 잠못들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학교 수업과 학과 공부는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소위 명문대학 입시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밤새워 글을 쓰거나 문학서를 읽고,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만 했으니, 이게 어디 요즘 같으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렇게 나아가는 삶이 나의 길이요, 그 길에서 추호도 비켜나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시를 읽고 좋아하고 쓰게 된 것은 중학 시절부터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선수가 된 나는, 중학 2학년이 되자 미련없이 축구부를 떠나 문예부로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도 문학은 운동을 하는 ‘재미’보다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내 영혼의 사춘기가 시에 눈을 떴다거나 할까요?

고교 시절에 만난 좋은 시 가운데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가 있습니다. 광주에서 문학강연회가 크게 열렸을 때, 다형 김현승 선생께서 낭독하신 작품입니다.

서울에서 온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강연에 하품만 하고 있다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와 박력 넘치는 시의 가락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연단을 응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로서는 하나의 감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형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나는 그 ‘자유’의 번역시를 빌려와 읽었으며, 그 시가 씌어진 배경과 그 시인에 대해서도 조금쯤은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는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지나쳐 버리지 않는다, 좋은 시란 개인적인 감정 토로에 그치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는 이민족과 총칼이 억압하는 상황에서도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좋은 시인은 그런 기개를 잃지 않는 대쪽 같은 사람이다…. ‘자유’를 여러 차례 읽으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와 광주 집에서 무위도식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나는 입대 전 대학 재학 중에 4ㆍ19와 5ㆍ16을 체험했으며, 이 와중에서 ‘현대문학’ 3회 추천으로 등단이라는 절차도 거친 뒤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학지에서도 원고청탁서 같은 것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취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친구 화실에 나가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 친구가 사주는 막걸리에 취해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드나들었던 ‘오센집’이라는 막걸리집은, 광주의 문인들과 화가들이 저녁마다 모여 담론을 펼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 주막에는 마침 그 무렵 신축 중이던 큰 빌딩의 토목공, 철근공 등 노동자들도 적지않게 모여 하루의 피로를 씻어가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 노동자들과도 친숙해져 말문이 트였지요. 허름한 옷차림의 노동자들 속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지식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들의 노동현장을 구경하는 때가 많았으며, 그 노동자 친구를 ‘나’로 변용시켜 ‘우리들의 양식’을 썼습니다.

등단 무렵(1961~62년)의 어렵고 관념적인 언어를 벗어나,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 삶과 시대를 함축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를 가명으로 중앙지 신춘문예에 투고해 당선(1967년)하고, 그 상금으로 서울 변두리 모래내에 사글셋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출판사에 취직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모래내 일대는 당시 거의 모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구차하게 살아가거나, 원주민들이 사는 시골과 같았습니다.

이농을 하고 올라와 도시 노동자, 상인이 된 사람들의 거처입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버스 종점까지 10리 길을 걸어 출퇴근을 했고, 일요일이면 조기축구회에 나가 운동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동네 친구가 많이 생겼습니다. 넝마주이를 하는 친구를 따라 난지도라는 곳을 처음 가보았으며, 철공, 미장, 택시기사, 청소부들과 어울려 능곡, 파주 등지로 천렵을 나가는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먹물’이 좀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눈’으로 ‘생각’으로 삶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나는 어느 사이 그들과 동화되어 있는 나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한 시대에 살아가는 개성적인 사람들이었으며, 모두들 가난, 외로움, 상처를 지니며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삶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가난, 외로움, 상처야말로 나의 시가 보듬고 가야 할 주제라고 믿게끔 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말까지 씌어진 나의 시들은, 모두 이처럼 소외되고 어렵게 삶을 이끌어가는 변두리 서민들의 정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서민적 기질과 체질의 나의 시가 자리잡힌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집에서 30여 분 걸어가면 난지도 쓰레기산이 나타납니다. 그 아래에 쓰레기 더미를 정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천막촌 같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온통 하늘을 가리는 먼지와 쓰레기 썩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그 속에서 이리저리 손으로 파리떼를 쫓으며 점심을 먹는 남녀 인부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파리 몇 마리 도시락 밥 위에 앉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밥을 먹었습니다. 소줏잔에 파리가 앉아도 그대로 들이켰습니다.

마치 파리들에게도 한 잔 마셔라 하고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짠하거나 슬펐던 것이 아니라 커다란 노여움으로 왔습니다.

이러한 풍경을 아무튼 배운 사람들은 모르고, 또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서 나는 자꾸 화가 치밀었습니다. 노여움을 가득 가슴에 담고 나는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 노여움은 내 안에서 익어 하나씩 시가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이후에 나는 언어와 시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신문 기자였습니다. 기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고, 시인이 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삭제되거나 은폐되었습니다.

불의와 허위가 교묘하게 미화되어 여론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그 갑갑한 시절에 시라는 것들은 진실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시와 언어를 경멸하는 시 몇 편을 썼습니다. 욕설과 자기 학대, 절망으로 가득한 그 시편들은 더욱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로부터 6, 7년 여 동안 나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시의 벙어리가 된 셈이지요. 김삿갓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방랑했다고 합니다.

그 5월에 싸우지도, 기개를 펴지도, 죽지도 못했던 비겁한 나를 나는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산으로만 더 깊이 빠져갔습니다. 산에서도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피해 되도록이면 인적이 드문 길로, 위험한 바윗길로만 다녔습니다.

동방삭이 말단 벼슬아치를 하면서 “…나는 속세에 숨어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궁궐 속에서도 세상을 피하고 몸을 보존할 수 있는데, 어찌 꼭 깊은 산 속 쑥대집 밑이어야 하리”라고 쓴 글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나는 서울에 살면서도, 기자를 하면서도, 세상을 등지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에 다닌지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시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각산과 설악산에서의 암벽 등반 체험들을 나는 그냥 머릿속 기억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름답고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들을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다시 시를 썼고, 이것들을 드문드문 발표하였습니다. 산은 그러므로 문학에서 떠난 나를 문학으로 복귀시킨 계기가 된 셈이지요.

산길은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어도 ‘혼자’ 가는 길입니다. 혼자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합니다. 아무도 내 발걸음을 대신 걸어주지 못합니다.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가면서도, 나의 생각은 혼자 엉뚱한 곳으로 가 꿈의 실체에 접근합니다. 혼자 가는 날에는 나의 영혼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며 갑니다.

혼자 가는 나를 지켜보는 것들도 많습니다. 손짓하는 풀꽃들, 나무들, 바위들, 바람과 햇볕이 있어, 나는 끝내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뼈다귀를 드러내고 서 있는 지리산의 고사목들은, 이 산에서 죽어 몸을 묻고 흙이 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영혼들로 다가섭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는 이렇게 역사의 숨결과 내음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나는 그 숨결과 내음을 나의 빈약한 언어로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로 씌어지는 것이지만, 언어가 갖는 힘과 희망의 덕목을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가는 길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문학, 삶, 산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문학을 왜 하는가. 문학이야말로 내가 기꺼이 선택한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연보

-1942년 광주 출생

-1962년 '현대문학'에 시 '열차'등으로 추천완료

-1963년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당선

-1969~97년 한국일보·일간스포츠 기자

-시집 '이성부 시집''우리들의 양식''백제행''전야''빈산 뒤에 두고''야간산행''지리산'산문집'산길' 등

-현대문학생(1969) 한국문학작가상(1997) 대산문학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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