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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만섭(15)청년시절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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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만섭(15)청년시절②

입력
2002.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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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퇴교 후 나는 연세대에 복학했다. 캠퍼스 분위기는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 거의 3년간 군 생활을 하고 돌아 온 내 눈에는 학생들의 걷는 모습, 옷차림 등 모든 것이 엉망으로 보였다.입학 동기생들은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초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먼저 학교에 정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응원단장을 맡은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원래 적극적인 성격인데 응원단장까지 맡다 보니 학교 일에는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는데 그 때문에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털보 응원단장의 명성은 연대 안팎에서 꽤나 높았다. 미국에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 온 백낙준(白樂濬) 총장이 채플시간에 내 수염 얘기를 할 정도였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우리 연희 동산의 나무도 많이 자랐지만 이만섭 학생의 수염도 많이 자랐겠지요….”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고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연대 털보’는 재학 기간 내내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말리고 막았다. 등교 때면 학교 정문에 버티고 서서 자가용을 타고 오는 학생들에게 모두 차에서 내려 걸어 가도록 했다.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 서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가 어려울 때인데 자가용 등ㆍ하교는 안될 말이었다.

신촌역 앞에서는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줄을 서라고 야단을 쳤고 버스 안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화여대생들은 연대 털보를 무서워했다. 이화여대 김활란(金活蘭) 총장이 백 총장에게 “이만섭 학생이 우리 학생들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항의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대학 시절의 추억 가운데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역시 연고전이다. 나는 응원단장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당시 연고전은 두 학교 뿐만 아니라 서울 시민의 축제였다. 선수들은 충돌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서로를 추켜 세우곤 했다. 응원단장은 상대 학교의 응원을 지휘하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면 연세대는 종로를, 고려대는 을지로를 점거(?)해 시가 행진을 했다. 주변의 막걸리집은 모두 연고대생 차지였다. 응원단장을 맡았던 인연으로 나는 국회의장을 맡기 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고전을 지켜 봤다. 그 덕분에 고려대 출신 정치인들과 퍽 친하게 지내 왔다.

대학 시절 또 하나 기억나는 일은 헝가리 학도의용군을 조직한 일이었다. 56년 소련군이 헝가리를 강점한 헝가리 사태를 전해 듣고는 연대생들로 의용군을 꾸렸다. 당시 같이 행동한 학생이 김각(金珏ㆍ전 코리아헤럴드 논설위원), 남홍우(南洪祐ㆍ전 대사) 등과 후배 유재건(柳在乾ㆍ국회의원) 등이었다.

우리들은 김용우(金用雨) 국방장관을 찾아가 뜻을 전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우리의 충정을 이해한다면서도 국제 관계상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만류했다. 이 사실은 언론에 보도돼 국내외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일로 나는 올 3월 헝가리를 공식 방문했을 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페렌츠 마들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헝가리 최고 영예의 훈장인 십자대훈장을 받았다.

학교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신경을 썼지만 그래도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동기생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어진 나로서는 결코 학업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강의 시간을 빼 먹는 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당시 연세대에서는 과마다 한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등록금을 전액 면제해 주었는데 내 이름도 자주 장학생 후보 명단에 올랐다.

1957년 졸업을 앞두고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외교관의 길을 걸을 것인지, 언론계에 몸 담을 것인지, 아니면 정치가를 꿈꾸었으니 곧바로 정계 진출을 꾀할 것인지의 여러 갈래 길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때 내게 결정적 조언을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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