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봄 나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에서 공부할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의과대학에 다닐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학교 선생님들도 나의 서울행을 부추겼다. “학비야 가정교사를 하든, 장학금을 받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만섭이 너는 주저하지 말고 서울로 가라.” 결국 아버지가 내 고집에 손을 들었다.
그 해 신입생 선발은 연세대가 가장 빨랐다. 서울대와 고려대보다 20일 정도 빨리 특차 전형을 했다. 나는 외교를 통해 나라에 봉사하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정외과를 지원해 간단히 합격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합격증을 받아 든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내 사정을 잘 아는 대륜중학교 선생님들이 월급을 조금씩 떼어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다. 지금도 이 일에 앞장 서신 권진태(權鎭泰) 담임 선생님과 반기화(潘基華)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서울 생활은 길지 않았다. 입학 25일 만에 6ㆍ25가 터진 것이다. 전쟁통에 한가롭게 공부하는 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나는 8월22일 공군사관학교에 지원, 11월1일 진해 공군사관학교에 3기생으로 들어갔다.
입학식에서 나는 학생 대대장으로 뽑혔다. 2학년 때는 생도회격인 오성회(五星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일했다. 지금도 공군 예비역 장교 모임으로 오성회가 있는데 그 뿌리가 바로 내가 만든 오성회다.
그러나 전투조종사가 되겠다던 나의 꿈은 2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53년 봄 모든 기초훈련을 마친 우리는 본격적인 비행 훈련만 남겨 둔 상태였다. 진해에서 대전의 항공학교로 이동, 비행 훈련 이전에 실시하는 마지막 지상 훈련이 끝나 갈 무렵 사건이 터졌다.
임관을 하루 앞둔 행정장교 후보생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부상자가 많아 공군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최소한 예닐곱 명은 어쩔 수 없이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생도회장인 나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회장인 내게 모든 책임이 있다. 모든 건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나는 결국 혼자 군법회의에 나섰다.
나의 희생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공사 출신 장교들은 물론 옥만호(玉滿鎬) 전 공군참모총장, 주영복(周永福) 전 국방장관 등 당시 유명했던 전투 조종사들도 나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최용덕(崔用德) 공군참모총장까지 유치장에 있는 나를 불러 위로하면서 이렇게 설득했다. “내가 평생 조종사 생활을 해 왔지만 이군 같은 성격은 비행기 타면 반드시 죽어. 대학을 다니다가 왔다니 차라리 복교해서 다시 공부를 계속하는 게 좋겠어.”
공군본부에서 열린 군법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나는 끝내 퇴교 조치를 받았다. 나는 퇴교하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3,4,5기생이 모두 두 줄로 교문까지 도열해 날 전송해 주었다.
동기생들은 굵은 눈물 방울을 감추지 않았다. 공사에 근무하던 장교, 사병, 문관, 심지어 식당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까지 나의 퇴교를 안타까워했다.
아쉽게 공사를 퇴교했지만 군 인사법에 의해 공사 3년을 군 복무 기간으로 환산해 법적으로 병역 의무를 마친 것이 돼 공군 이병으로 전역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2001년 11월3일 나는 청주 공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입학 동기생들과 재학생들의 축하 속에 공사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공군사관학교와 공군은 반 세기 전에 일어난 그 일을 새롭게 평가해 3기 사관 입교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나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공사 개교 이래 제1호인 나의 명예 졸업장은 지금도 공사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전투 조종사가 되고자 했던 6ㆍ25 당시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2001년 11월 나는 공군사관학교 최초의 명예 졸업장을 받고 조종석에 앉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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