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은 요원한 과제인가.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과 광복회는 올 2월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추가 조사 및 특별법 제정 등을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후속 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태다.이런 가운데 광복절 57주년을 앞두고 학계와 문화예술계에서는 친일파 형성 과정과 행적, 광복 후 친일 청산 운동이 좌절한 원인, 친일 청산 운동의 향후 과제 등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가 잇따라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각 분야 진보적 학술단체들의 모임인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ㆍ대표 김교빈)는 13일 오후 2시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한국 근ㆍ현대사 속의 친일의 의미와 친일파 청산운동의 필요성’을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연다.
정해구 학단협 운영위원장(성공회대 교수)은 “친일파의 온존이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 발전을 가로막는 뿌리라는 점에서 친일 청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면서 “친일 문제를 지나간 역사로 묻어두려는 일각의 움직임에 맞서 친일 청산 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피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강창일 배재대 교수(역사학)는 ‘친일파의 형성과 친일의 논리’라는 주제발표에서 친일 세력을 한일합방 때부터 적극 협력한 ‘매국 친일파’, 민족지도자로 행세하다 내선일체론에 동화된 ‘변절 친일파’, 이른바 황민교육을 받고 입신출세를 위해 일제에 협력한 ‘황민 친일파’로 분류하고, 이들의 다양한 친일 논리를 분석한다.
또 광복 후 변절 친일파들이 한때 민족지도자로 행세한 전력을 내세워 면죄부를 받고, 황민 친일파들이 엘리트 집단을 형성해 군 경찰 등 정부 조직과 경제계 학계 법조계 등을 장악한 과정도 살핀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는 광복 후 친일파를 청산할 충분한 사회적 여건이 마련됐지만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요인을 해부한다.
그는 주제발표문에서 “친일 청산 실패는 집권층의 의지 부족보다는 사회주의 확산 저지를 위해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적극 활용한 미국의 점령정책에 근본 원인이 있다”면서 “미국은 남한뿐 아니라 필리핀 등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미국의 영향 하에 놓인 국가들에도 이 같은 정책을 일관되게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은 분단 이후 친일파 청산 운동의 흐름과 향후 과제를 살핀다.
박 연구원은 특히 친일을 했지만 공(功)도 인정해 면죄해야 한다거나 변절 친일파의 행각을 민족지도자로서 겪어야 했던 수난으로 미화하는 등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각종 논리를 열거하고,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할 예정이다.
그는 “최근 친일파 명단 발표가 거센 역풍을 맞은 것은 친일 세력이 지금도 우리 사회 특권층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면서 “친일 청산과 역사 바로잡기 작업을 통해 ‘정의는 칼을 쥔 자의 것이고 역사의 언제나 권력의 편’이라는 그릇된 역사인식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단협은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친일 청산 운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술적 연구를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는 14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문화예술 각 분야의 친일 행위 실태와 그 성격을 논의한다.
친일 예술작품 창작이 작가의 신념과 사상의 표출인지, 일제의 폭압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검증한다는 것이 기획 취지다. 무엇보다 광복 이후 창작 활동과의 연계성을 검토해 친일 논리가 갖는 현재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지를 주목할 만하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의 발표는 친일 문학작품을 작가의 판단에 따른 자발적 창작 행위로 전제하고, 내적 논리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발표된 글 가운데 이른바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와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전쟁 동원’ 주장을 글에 담아 선전한 것을 친일 문학으로 규정한다.
또 친일 작품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폭력적 이데올로기가 내재돼 있으므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술평론가 최 열씨는 친일 미술 창작의 개념과 범위의 기준에 대해 “일제의 야만과 폭력으로 파괴당한 인간성을 절대치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기준에 따라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 당시 참가ㆍ협력했던 미술인은 강요나 자발 여부와 상관없이 친일 부역미술 행위자로 규정된다는 것이 최씨의 주장이다.
그는 광복 후 미술계를 풍미한 일본식 미술의 이식과 침윤에 대해서는 ‘식민성 비판’이 제기될 수 있지만, 이 평가 기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다.
노동은 중앙대 교수는 음악인들의 친일 행적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조명한다.
‘대동아 건설을 위한 음악 보국운동’이란 논리로 친일 음악 창작에 앞장선 작곡가 홍난파와 현제명, 일제에 경도된 음악비평을 한 평론가 김관과 박용구 등 음악가 개인의 활동과 함께 1938년 경성음악협회와 1941년 조선연예협회 등 음악단체의 조직적인 친일 활동을 검증한다.
영화계의 친일 실태를 조명한 이효인 중앙대 교수는 1939년 발족한 조선영화인협회 등 친일 조직 결성과 친일 영화 제작 행위를 ‘자발적 혹은 자동적인 것’이라고 파악한다.
이들의 행위가 광복 후에도 아무런 반성적 제재를 받지 않아 비사회적, 비민족적 행위를 양산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또 친일 행위를 한 영화인들이 한국 영화계를 주도함으로써 한국 영화계가 무분별한 상업적 획일성으로 치닫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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