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관 의원총회에서 일주일 후에 열기로 한 의원총회가 소집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청와대에서 다시 나를 불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또 다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내일 의원총회에서 이후락(李厚洛), 김형욱(金炯旭)의 해임 문제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의원이 좀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각하! 국민투표를 하기 전에 반드시 두 사람을 교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민투표에서도 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국민 모두가 싫어하는 데 왜 굳이 그 사람들을 곁에 두려 하십니까?”
“이제 곧 국민투표를 해야 하는 데 지금 어떻게 그 체제를 바꾸겠나? 국민투표가 끝나고 난 뒤 내가 조치할 테니,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국민투표가 끝나게 되면 그 사람들은 공로자가 되는데 어떻게 자를 수 있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나중에는 인간적으로 호소하고 나섰다. “아니야, 나를 믿어 줘. 국민투표 직후에 틀림없이 조치할 테니…. 대신 이건 이 의원과 나 둘 만의 비밀이니 꼭 지키도록 해요.” 대통령이 몇 번이고 약속을 하는데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1969년 8월6일) 의원총회가 열렸다. 난 박 대통령과 약속한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정간용(鄭幹鎔) 의원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지른 것이다.
“오늘까지 이후락 김형욱 두 사람을 바꾸지 않고 있소. 나는 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삭발하겠소.” 말을 마친 정 의원은 본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바로 그를 쫓아 가 소매를 붙잡고 달랬다. “나를 믿고 머리를 깎지 마시오.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드리겠소.” 대통령과의 밀약이 있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 답답했지만 정 의원의 항의 삭발을 끝내 막지 못했다.
이날 의원총회에서 더 이상 해임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튿날 윤치영(尹致暎) 의원 외 121명의 이름으로 대통령 3기 연임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3선 개헌안이 국회에 제안됐다. 3선 개헌안은 9월14일 새벽2시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 몰래 변칙 통과됐다.
전날 밤 야당 의원들은 “절대 오늘 밤에는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의 말을 믿고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사실 이 의장도 그날 일이 벌어 지리라고 알지는 못했다.
청와대의 지시는 한밤중에 내려 왔고 거의 같은 시각에 모든 공화당 의원들도 은밀한 소집 통고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 65.1%의 찬성으로 개헌안이 확정된 뒤 이후락 실장은 주일 대사로 보냈고, 김형욱 부장은 물러나게 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이후 박 대통령은 10년 뒤 10ㆍ26으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단 한번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와의 개인적인 정을 매몰차게 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8대 때는 마지 못해 공천을 줬지만 중앙정보부 등에서 내 선거를 방해하는 것을 모른 척했고, 9대 때는 공천도 주지 않았다. 3선 개헌 반대 투쟁은 내게 정치적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안겨 주었다.
나중에 김성곤(金成坤) 의원한테 들은 얘기지만 나는 자칫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 김형욱 부장이 살인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김성곤 의원이 알아 내 급히 박 대통령에게 알렸다고 한다. “각하!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만섭 의원이 다치게 되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이 의원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김형욱이가 그러는 게요?” 박 대통령은 즉각 그 자리에서 김 부장을 전화로 불러 야단을 쳤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만일 김 부장이 이만섭 의원의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성곤 의원이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 이후 나와의 개인적 인연을 끊었다. 사진은 3선 개헌 이전 대구 경북 출신 의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나와 악수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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