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재지이-명·청대 설화등 바탕 단편 497편 수록귀신과의 사랑을 그린 왕주셴(王祖賢) 장궈룽(張國榮) 주연의 ‘천녀유혼’(倩女幽魂)이나 중국 무술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을 들으며 1975년 칸 영화제 고등기술대상을 수상한 ‘협녀’(俠女)는 신비로우면서도 환상적인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로 유명하다.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이 두 영화의 줄거리를 제공한 책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의 중국 4대 기서에 더해 유림외사(儒林外事) 홍루몽(紅樓夢) 금고기관(今古奇觀)과 더불어 8대 기서로 꼽히는 요재지이가 우리 글로 완역돼 나왔다.
중국 청대의 포송령(蒲松齡ㆍ1640~1715)이 쓰고 한밭대 어문학부 김혜경(40) 교수가 옮긴 이 책에는 중국 명, 청대의 설화 민담 일화 등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 497편이 수록돼 있다. 구어인 백화(白話)가 아니라 전통 문어인 고문으로 씌어졌다.
요재는 포송령의 서재 이름으로 제목을 풀이하면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 쯤 된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는 당대의 사회상 및 가정생활, 남녀간의 애정, 천상의 세계, 자연 재해 등 매우 다양하다. 이야기마다 10쪽 내외의 짧은 분량인데 귀신도 나오고 여우도 나온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중국 색채가 짙은 동양적 판타지라 할까.
한 선비가 여인을 희롱하다 여인의 시녀가 던진 흙이 눈에 들어가 실명하지만, 눈동자 속에 살고 있는 난쟁이 때문에 한쪽 눈이라도 뜨게 된다는 동인어(瞳人語)나, 어여쁜 소녀로 둔갑한 귀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나 도사의 도움으로 귀신을 죽이고 다시 살아나는 화피(畵皮), 사람의 내장과 얼굴을 바꿔치기하는 육판(陸判), 여우의 딸과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영녕(嬰寧) 등등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씨(顔氏) 황영(黃英) 교나(嬌娜) 청봉(靑鳳) 등의 이야기에서는 여성을 멸시하던 당대의 통념과 달리 고귀한 품성을 지닌 재능있는 여성이 등장하며 애정 표현도 과감하다.
부자 고부 부부 형제 등의 갈등을 통해 봉건 윤리관념이 동요하고 있는 사실은 이상(二商) 증우우(曾友于) 호사낭(胡四娘) 등에서 읽을 수 있다.
소추(素秋) 편에 나오는 한 서생이 “예절이란 것은 사람의 감정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정이 이토록 두터울진대 서로 다른 종족이라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예절로써 감정을 절제한다는 전통 관념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포송령은 명이 망하기 직전에 태어나 청 초기 병란과 재난이 잇따르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기에는 봉건체제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사회사상이 출현했었다. 포송령도 당대의 사대부처럼 현실을 변화시키리라는 욕망이 있었지만 부패가 만연하던 청대의 과거제도 하에서 꿈을 펼칠 수 없었다.
권세가에 아부하는 짓 따위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요재지이의 창작에 몰두한다. 그는 스스로 요재지이를 ‘고독한 울분의 책’이라는 뜻의 ‘고분지서’(孤憤之書)라 불렀는데 그의 고독과 울분은 현실에서 생겨나 그 현실을 다시 겨냥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만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젊어서부터 기이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였다.
어쨌든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과 울분은 책의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산둥 사람 장옹지(張翁之)의 처가 북병(北兵)에 납치돼 행방불명된다는 내용의 장성(張誠)이 대표적. 귀예(鬼隸) 한방(韓方) 난리(亂離) 등의 이야기도 비슷한 내용이다.
명과 청이 교체되던 시기에 산둥 지방에서 살았던 포송령은 청의 군사가 노략질로 주민들에게 막대한 재난을 입혔던 사실을 이들 이야기를 통해 암시한다.
궁중에서 귀뚜라미 놀이나 즐기는 바람에 향리의 서민들은 고통을 받는다는 촉직(促織), 과거시험장의 폐단이 저승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신랄하게 파헤친 석방평(席方平), 고급 관료의 악덕을 그린 속황량(續黃梁) 등을 통해서는 부패하고 혼란스런 현실을 고발한다.
요재지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등의 언어로 번역됐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몇 차례 번역된 적이 있지만, 일부만 발췌하거나 원본을 판본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고 출판사측은 밝혔다. 마오쩌둥(毛澤東)과 헤르만 헤세도 이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포송령 지음ㆍ김혜경 옮김
민음사 발행ㆍ전6권 각권 1만2,000원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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