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군주 시대 절대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하늘과 역사였다. 하늘이란 농사를 좌우하는 날씨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이(理) 즉 도리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쓰여 그리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란 권력자 자신과 부왕에 관한 기록이라는 구체성 때문에 하늘보다 무서워 하였다.조선시대의 성군 세종대왕은 부왕에 관한 역사의 평가가 궁금해 태종실록을 보겠다고 고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일화는 누구도 역사 편찬에 간섭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태조와 태종이 사초(史草)를 열람한 선례를 근거로 세종이 태종실록을 보려고 하자, 실록 편찬자 맹사성(孟思誠)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면 사관의 직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논리에 왕이 굴복하고 말았다.
몇 해가 지나 세종은 또 실록열람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정승 황희(黃喜)가 나섰다. “그 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의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고집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아무도 실록을 볼 수 없다는 결정적인 선례가 되었다. 폭군 연산이 부왕의 실록사초를 모두 가져오라 했을 때도 신하들은 이 선례를 이용해 물리칠 수 있었다.
사관 김일손(金馹孫)의 사초를 문제 삼아 훈구세력이 일으킨 무오사화 때, 연산군은 죽은 사관을 부관참시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능지처참했지만 실록을 보지는 못했다.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신하들의 반대가 완강하면 할수록 왕이 실록을 보고싶어 했던 것은 실록의 서릿발 같은 비판 때문이었다.
실록이 단순한 사실 기록이라면 그렇게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록에는 왕이나 재상 같은 중요인물, 특정사건이나 정책 등에 대한 사관 자신의 평가가 붙어 있다.
사관은 측근에서 마치 녹음하듯 왕의 말과 행동을 기록해 춘추관 창고에 보관하고, 퇴근해서는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평가를 적어 따로 보관했다. 양심의 명령에 따른 기록이었다.
가장사초(家藏史草)라 불리는 이 역사비평은 실록편찬의 필수 자료였기 때문에 왕과 권력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엄정한 비판정신의 산물인 조선왕조실록은 어느 나라 실록보다 훌륭한 사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 25대 472년의 살아있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의 외형은 888책 1,893권이다.
중국의 명 또는 청 왕조 실록에 비해 부피는 적지만, 내용은 비교가 안될 만큼 훌륭하다. 일본 베트남 같은 나라에도 실록이 있으나 유독 조선왕조실록만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추상 같은 비판정신이 높이 평가된 때문이다.
조선의 역사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대 519년이지만, 실록을 25대 472년간만 치는 것은 고종과 순종, 마지막 두 임금의 실록이 일본인 편찬관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편찬의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운 것은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다. 전 정권은 공과를 고루 언급하고 현 정권은 치적 중심으로 기술한 편향성이 문제가 된 것도 그렇고, 현 정권을 제외하자느니 포함하자느니 하는 논란과 책임공방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느냐에 달렸다. 집필과 검정에 작용하는 불순한 의도를 차단하면 그만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이 부단하게 역사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도 하나의 역사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권력은 당대를 침묵시킬 뿐, 후세 사관들의 붓을 꺾지는 못한다. 그래서 역사가 하늘보다 무섭다는 것이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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