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밭이나 보리밭에 나타난 기하학적 기호, 이른바 ‘크롭 서클(Crop Circle)’은 우주인의 존재를 믿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사람의 힘으로는 하룻밤 안에 만들 수 없다는 거대한 서클에 대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마니아’ 수준의 연구가 줄을 잇고 있다.‘싸인(Signs)’은 바로 ‘크롭 서클’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 표정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성공회 신부인 그래함(멜 깁슨)은 옥수수 밭의 거대한 기호가 이웃에 사는 불량한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지만, 조금씩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딸 보(아비게일 브레슬린)는 “물이 오염됐다”며 물을 마시지 않기 시작하고, 아들 모건(로리 컬킨)은 어린이용 무전기로 외계인의 신호를 감지했다고 떠들어댄다.
‘식스 센스’로 젊은 호러의 거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이번에는 매우 지적인 서스펜스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그의 주제의식은 한마디로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이다.
옥수수밭의 거대한 기호도, 딸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것도, 차 사고로 죽은 아내가 내뱉은 이상한 유언도 일정한 운명의 선을 따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신에게 봉사했던 대가로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신을 부인하기 시작한 그래함 신부는 이런 증거를 목격한 후 다시 신의 조화를 인정하게 된다. 신에 대한 부정이 더 큰 긍정으로 결말을 맺는다.
나이트 샤말란은 감히 ‘아날로그형 외계인’을 내세우는 시대를 거스르는 발상을 통해 SF 영화의 관성을 깨뜨리고 있다. ‘크롭 서클’을 만들어 놓은 외계인은 ‘화성침공’이나 ‘맨 인 블랙’ ‘콘 헤드’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보여진 첨단기기로 무장한 외계인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중병에 걸린 E.T처럼 지구인을 두려워하며, 지구인의 공포를 확인 한 후 적대적인 관계로 변한다. 그들은 첨단의 무기도 갖고 있지 못하며, 시시각각 외모가 변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귀신이었음을 알게 되는 ‘식스 센스’식의 놀라움은 없지만 운명에 대해 생각케 하는 여운이 적지 않은 영화. 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싱거운 영화이기도 하다. 멜 깁슨과 삼촌 헤스역의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에서는 공포나 좌절이 깊이 느껴지지 않는다.
호러가 아니라 서스펜스를 주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면 꽤나 매력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신의 조화에 대한 경배와 ‘크롭 서클’이라는 소재는 미국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지 2일 미국에서는 개봉 주말 3일간 6,000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리며 1주일 만에 제작비(6,200만 달러)를 건졌다. 9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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