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씨의 시집 ‘위대한 식사’(세계사 발행)를 읽었다. ‘민중적 건강성’이라는 말은 1970년대 이래 우리 문학의 어떤 흐름 속에서 너무 되풀이 징발되다 보니 이젠 닳고닳은 상투어가 되었지만, 이재무씨의 시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을 달리 찾아내기도 어렵다.이재무씨의 시가 담백하게 풍경을 그리든 그 풍경 속에 자신을 깊이 투사하든, 그의 언어는 동시대 민중 정서의 깊은 뿌리에까지 다다라 있다. 그가 대지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번 시집에서도 역연하다.
그러나 시인도 나이를 먹나 보다. 기자는 시집을 읽다가 ‘병(病)’이라는 작품에 오래 머물렀다. 시인의 달관 속에서 기진(氣盡)의 기미가 읽혔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병은 삶의 나른함을 씻어내고 긴장을 부여하는 정화제 같은 것이다. “잊을 만하면 그대는 찾아와/ 내 생활의 안위와 평안에 시비를 건다/(…)/ 나는 마음이 거처할 집/ 평생에 다 짓지 못할 것이다.”
불자(佛子)들은 태어남, 늙음, 죽음과 함께 병듦을 중생이 겪을 수밖에 없는 네 가지 괴로움으로 꼽는다. 그런데 그 가운데 병은 다른 셋과는 조금 다른 층위에 있다.
태어남ㆍ늙음ㆍ죽음 앞에서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평등하지만, 병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타고난 체질이나 가진 재산에 따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병고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시인은 그렇게 좋은 팔자는 아닌 듯하다. 그에게 병은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시인은 그 병을 단순히 괴로움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병으로 하여, 삶은 권태 너머의 그 무엇에 이른다. “권태에 친해져 아픔 없는 생이 견딜 만하면/ 그대는 찾아와 바람 부는 들녘, / 흐느껴 우는 강을 보여준다.”
시인은 병이 “빛보다는 어둠에 친화한 삶/ 다 살아낸 후에야 나를 떠날” 것이라고 짐짓 소침하지만, 이어 “나는 오늘도 그대로 하여 큰도적이 되지 못하고/ 작은 슬픔 하나에도 위태로워져 크게 울고 있다”고 자부한다.
마지막 두 행이 왜 ‘자부’인가? 그것이 ‘나는 시인이다’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작은 슬픔 하나에도 흐느끼며 세계의 비참에 공명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빛보다는 어둠에 친화한 삶”이라는 이재무 시인의 자기 규정을 반만 믿는다. 그의 시가 사회의 그늘진 곳에 따스한 눈길을 건네왔다는 점에서 그 진술은 옳지만, 늘 민중의 건강한 낙관성 위에 구축돼 왔다는 점에서 그 진술은 그르다.
시인이여, 같은 시집에 실린 시 ‘신생(新生)’을 다시 보라. 고목의 가지 위에 맺힌 물방울들이 더러는 흙살 속으로 파고 들며, 더러는 새의 심장 속으로 스며 날개에 힘을 보태며 이 행성을 생명으로 채우는 어떤 순간들을 묘사한 이 시에서 당신은 “세계에 완전한 소멸은 없다”고 선언했다.
당신의 시 세계는 생명의 빛으로 밝고, ‘신생’의 마지막 행을 빌면 “연초록의 그 촉촉한 입술”처럼 싱싱하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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