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는 것이라면, 협상은 서로 양보하여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다. 한 나라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전쟁과 달리 협상은 상대방에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그러나 협상대표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줄 것을 주지 않으면서도 얻어낼 수 없는 것까지 얻어낼 수 있다. 반면 주지 말아도 될 것을 주면서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조차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보건의료서비스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시장개방을 논의하는 WTO DDA(New Development Agenda in Dohaㆍ도하개발아젠다) 협상 대표단에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협상결과에 따라 우리의 생존권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칫 ‘협상을 위한 협상’이 이뤄져 소(小)를 위해 대(大)가 희생당하는 결과가 나올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미 제출된 각국의 양허 요구안을 토대로 당사국간 양자회담이 공식, 비공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7월말 제네바에서 개최된 WTO 서비스무역 이사회에서 우리 나라는 일본과 캐나다와의 회담을 시작으로 중국,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과의 양자회담을 계속했다.
150여 개에 달하는 협상 항목은 보건의료 서비스를 비롯해 법률, 교육, 방송 등 국민의 실생활과 생명에 직결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협상에 파견된 우리 대표단은 29명으로 회원국 중 최대였다. 협상단을 대규모로 구성한 이유가, 3~10명 선으로 대표단을 구성한 미국, 캐나다, 영국, 중국 등 대부분의 국가를 '인해전술'로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번 우리 대표단의 면면과 구성을 보면, 과연 우리의 국익을 제대로 반영시킬 대표단 구성이었는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대표단의 규모가 그토록 커진 이유는 무엇인가. 혹여 각 사안에 대한 부처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특히 보건복지부의 경우 부내 입장 차이가 없었다면, 관련 공무원을 4명이나 협상장에 파견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정부내 협력이 잘 된다면 이 모든 것은 기우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표단의 분야별 전문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한의사협회, 대한병원협회, 대한치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간호사협회 등은 협상 시작 수일 전 보건복지부로부터 외국의 의사면허제도 등에 관한 방대한 질의와 함께 즉답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전문가의 견해가 절실한 사인인데다 워낙 시일이 촉박했으므로 이들 협회는 공동비용으로 대학교수 2인을 추천하여, 정부로 하여금 WTO 협상장에서 이들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정부는 '전문가는 필요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우리의 공무원 인사는 순환보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시야가 좁아진다는 등의 이유로 1-2년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고 있다. 한 사람이 10년 가까이 협상대표로 참여하는 외국과 달리 우리는 협상 도중에 담당자가 교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가 양성될 수 있을까. 미국조차 협상에 임할 때 전문 변호사를 대동하는 것은 물론 필요할 경우 전문 통역사까지 참여시키는 상황에서 '전문가는 필요없다'는 정부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부가 민간인을 참여시켜 운영하고 있는 위원회 또는 자문회의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회의에 참여해 본 사람은 운영이 형식적이고, 구색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협상대표가 공무원이어야만 한다면, 내용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문적 조언을 받아 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협상이 잘못되었을 때 공무원 몇 사람의 경질로 이미 벌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국민의 생존권이 달려 있는 국제 협상장을 더 이상 전문성이 부족한 공무원의 훈련장으로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인성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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