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환경벤처 가이아를 운영하고 있는 한필순(韓弼淳ㆍ69)박사는 원래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다.1970년부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국형 방위산업 제품 개발에 노력했고, 80년대에는 원자력 분야 연구, 행정업무를 맡았다.
반환경적이라고 비판을 받는 원자력 연구업무에 정열을 쏟았던 한 박사가 60세가 넘어 환경벤처기업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자에게는 정년이라는 개념이 특별히 없다. 평생 하나의 연구목표를 가지고 발견과 증명의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온 과학자들이 교수나 연구원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떠났다고 해서 연구를 그만두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정년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53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물리학과의 인연이 원자력 에너지 연구로 이어져 60세가 되기 전까지 나는 그와 관련된 일만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180도 다른 방향으로 과학이 남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97년부터 나는 대전에 있는 환경 벤처기업 ‘가이아’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50년대 이후 40년간 방위산업과 원자력 관련 연구를 하고, 원자력 관련 공직에 있었던 내가 음식물 재처리, 폐타이어 활용에 필요한 환경정화기계 제조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의아해한다. 원자력과 음식물 쓰레기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정년 이후에 가이아라는 환경 벤처에 뛰어들어 지금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공사를 졸업하고 공군장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는 곧 서울대와 미국 일리노이대와 UCLA에서 물리학으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맡았던 일은 공사 물리학과 학과장이었고, 1982년까지는 국방과학연구소 제3사업단장으로 일했다.
한국형 수류탄, 방탄헬멧, 발칸포 개발 등 방위산업 분야에서 일하던 내가 1983년부터 9년 동안 최장수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낸 것은 내 삶에 있어 중요한 전기였다.
한국형 원자로, 중수로용 핵연료 등을 국산화하고 원전 운영의 기초기술을 확보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던 9년이었다.
현재 발전용량의 40%를 차지하는 원자력 발전의 개발 초창기부터 제자리를 잡는 순간까지 원자력 연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원자력 발전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원전이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는 대표적인 반환경 시설이라고 비판하는 환경운동도 거세졌다. 핵폐기물 처리시설 설치와 원전 건설은 환경 운동을 넘어 하나의 사회운동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의 환경 친화성에 대해 아무리 강조를 해도 환경운동가와 지역 주민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참 답답한 시기였지만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써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내게 기회가 왔다. 90년대 초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직에서 물러난 후 2년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연수를 다녀올 기회가 주어졌다.
이때부터 지구환경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환경운동이라는 것이 생활 속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과 밀접한 환경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97년 원자력연구소 연구위원직을 끝으로 공적인 자리를 물러나면서 환경 벤처에 뛰어들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환경벤처는 가이아라는 곳이다. 가이아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구의 어머니다.
죽어가고 있는 지구의 어머니를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생각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직원 20명의 작은 벤처기업이지만 대부분이 연구원 출신으로 기술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그 기술이라는 것이 아주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음식물 처리, 폐타이어 활용, 유기물 고속건조기술 등을 응용한 제품 개발이 주요 연구개발 분야다.
음식물 쓰레기를 24시간 이내에 고속으로 건조, 발효시킬 수 있는 음식물 고속 발효기는 하루에 두 번 음식물 쓰레기를 넣으면 50㎏을 처리할 수 있다.
처리된 음식물 쓰레기는 동물의 사료 등으로 재활용 돼 환경오염 예방이라는 효과가 있다. 삼성전자, 대전 농수산물시장과 일본에 설치되어 성능을 인정 받았다.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폐타이어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처리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도 환경을 생각하고 있고, 음식물 쓰레기 재처리도 환경문제를 고민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지금 나는 아주 거창한 환경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자력 연구만큼 보람이 있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생활이 편리하고 윤택해지지만 그만큼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는 것은 모두 안다.
하지만 누가 진정으로 환경문제를 고민하면서 실천을 해왔던가.
오늘도 오전에 시작된 회의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피곤하지만 보람도 크다. 60세가 넘어 새롭게 시작한 환경벤처 일은 내게 제2의 인생을 열어주고 있다. 나 자신의 보람과 사회의 요구가 맞아 떨어지는 이 일이 참 자랑스럽다.
/한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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