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호기씨의 시집 ‘수련(睡蓮)’(문학과지성사 발행)은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라는 제목의 10행 시로 시작한다.첫 행을 제목으로 삼은 이 시는 시집에 묶인 수련 시 53편의 수련(首聯)이자 총론이다. 시집 ‘수련’에는 모두 64편의 시가 모였는데, 그 가운데 수련을 직접적 제재로 삼지 않은 작품은 11편 뿐이다.
수련에 대한 시인의 수련(修鍊)이 얼마나 집중적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는 이 시집의 한 주제라 할 물과 빛의 에로티시즘을 표본적으로 요약한다.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동양 사람들에게 수련은 잠자는(밤에 오므라드는) 연(蓮)이지만, 물론 첫 행의 ‘수면’은 수면(睡眠)이 아니라 수면(水面)이다. 화자는 어느 연못 가에 서 있다. 수련꽃이 필 계절이니 여름일 터이다.
한 낮일까? 아니다. 빛이 수직으로 쏟아지지 않고 비스듬히 미끄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침나절이거나 깊은 오후일 터이다. 화자는 물 위로 미끄러지는 빛에서 몸에 미끄러지는 밀어(蜜語)를 연상한다.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화자는 수련꽃 사이로 미끄러지는 햇빛에서 물고기들의 반짝이는 비늘을 떠올린다.
황홀한 정경이다. 물은 빛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이고 그 사이에 하얀 수련꽃이 피어나있다. 빛들은 계속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며 물을 간질인다. 물을 애무한다.
수직으로 꽂히는 햇빛이 때리기라면, 비스듬히 미끄러지는 햇빛은 간질임이고 애무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다. 언어도 살에 꽂히는 게 아니라 미끄러질 때야 밀어가 된다. 그러나 화자는 문득 그 미끄러짐이 안타깝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듯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화자가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이루지 못할 사랑 같기 때문이다. 물과 빛이 스치기만 할 뿐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끄러짐-간질임은 사랑의 시작일 뿐 완성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워라, 그 빛과 물의 미끄러짐이 섬광처럼 아름다운 수련꽃을 피워내고 있다.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수련은 빛과 물의 사랑이 낳은 열매인가? 이 시에서는 언뜻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시집의 갈피가 새로워지면서 수련은 사랑의 주체로 떠오른다. 그래서 그 수련은 사람 이름 같기도 하다. 수련(秀蓮)? 또는 수련(穗戀)?
시인이 보기에 미끄러짐으로서의 사랑은 미완의 사랑인가? 결국은 아니다. 에로티시즘으로 그득 찬 이 시집에서 유일하게 ‘사랑은’이라는 노골적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이 그 증거다.
시인은 거기서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용자) 달라붙듯이” 온 사랑을 노래한다. 그 사랑은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를 남긴 채 가 버린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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