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끝난 지 꼭 한달이 지났다.많은 이들은 걱정과 흥분 속에 지낸 6월의 그날들을 아직도 꿈처럼 간직하고 있다.이제 와 다시 돌이켜봐도 월드컵이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그것은 결코 단순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다.월드컵은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를 내부로부터 바꿨다.폭발할듯한 역동성과 세계를 향한 당당한 자신감이 아마도 유사이래 처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정서로 자리잡았다.월드컵 후 한달동안 우리 사회 전반에 나타난 의미있는 변화들과 함께 아쉬운 측면까지 두루 점검해 본다./편집자주■어떤 변화 생겼나
월드컵 축제 때 점화된 열기는 좀처럼 식지않은 채 오히려 사회 각 저변으로 스며들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길거리 응원에서 시작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은 젊은이들의 국토 순례 행진이나 우리 문화 배우기 캠프로 표출되고 있으며, 월드컵을 수준 높은 질서의식으로 치러낸 개최국가의 자신감도 생활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다. 축구장에서 이뤄 낸 기적을 사회, 경제, 정치 분야로 연결시키려는 의지도 뚜렷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 국토 사랑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늘어
월드컵 한국경기 때마다 붉은 옷을 입고 경기장, 길거리로 몰려들었던 젊은 세대들은 이제껏 소홀히 했던 자신들을 소중하게 돌아보기 시작했다.
과거 일부의 극기체험 정도로나 여겨졌던 국토 순례 등의 행사나 각종 전통문화 강습 등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들까지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토행진·전통문화 강습 참가 급증
질서준수·외국인과 관계 '업그레이드'
기업들 히딩크式 실력인사 확산
서울 강남의 국토순례 전문업체 관계자는 “학업 스트레스가 극심한 고등학생들까지 참가하고 있다”며 ”인터넷 등을 통해 조직된 자발적인 모임까지 합할 경우 전체 순례단 참여인원만 해도 예년의 5배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세계시민으로 한 걸음 다가선 한국인
외신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수준 높은 질서의식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직장인 강기철(29ㆍ서울 양천구 목동)씨는 “영화관이나 공연장을 떠날 때 마다 한번 더 주의를 살피게 된다”며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는 자부심 때문에 쉽게 쓰레기를 버리거나 함부로 행동을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세계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신감도 두드러진다. 미국 공인회계사 김대일(30)씨는 “월드컵이 끝난 후 외국인이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몰라지게 달라졌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자신있게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미국이나 일본 편향에서 제3세계에 대한 관심도 증대됐다. 월드컵을 통해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터키나 네덜란드를 사랑하는 동호회가 인터넷에서 속속 생겨났다. 대학생 권유(25ㆍ연세대 심리학과)씨도 “미국식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틀로 세계를 봐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갖게 됐다”라고 말했다.
▲ ‘축구처럼’ ‘히딩크처럼’ 신드롬 확산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낸 축구배우기 열풍은 서점가에서 단연 돋보인다. 6월 한달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축구스타 홍명보의 자선인 ‘영원한 리베로’였다.
7월에도 20여종의 축구관련 신간이 나왔고, 축구 스타를 실은 화보, 축구소설 판매율이 급증하고 있다. 축구 배우기 열풍은 곧바로 ‘경제, 정치도 세계 4강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고 있다.
채용과 인사고과 산정 때 학연과 지연을 배제하고, 실력을 우대하는 히딩크식 관리체계가 기업 문화까지 바꾸고 있다.
채용전문업체 리쿠르트의 이정식 사장은 “실력을 최우선시 하는 기업문화가 히딩크 신드롬의 영향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며 “LG전자나 제일제당 등이 실제로 서류보다는 면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채용 방식을 바꾸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업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나 관공서, 학교 등에서도 축구전사처럼 세계4강에 도전하자는 구호가 잇따라 등장해 사회전반적으로 목표치가 상향 조정됐다.
▼그러나 아쉬운 점들도
사회 전반의 공공의식은 아직은 착근하지 못한 채 기대치를 크게 밑돌고 있다.특히 교통문화에 대해서는 과거 서울올림픽 때와 같이 한바탕 이벤트성 질서에 그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또 월드컵 때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것은 전국민적 화합의 정서였으나 이후 정치,군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계층,지역,이념 등의 고질적인 갈등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월드컵 당시 거리를 온통 휩쓸었던 태극기 사랑의 물결도 시들해졌다.지난번 제헌절 때 가정에내걸린 태극기는 예년 수준을 넘지 않았다.
정원수기자
nobleli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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