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강한 침투력을 코믹하게 드러내주는 장면을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북한의 오경필 중사는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 건네 준 지포 라이터를 들고 “역시 미제란 말이야”라는 말을 연발한다.그를 힐난하던 왕년의 미술학도 정우진 전사도 이 병장이 내미는 미제 포르노 잡지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오 중사는 또 다시 “역시 미제라니까”라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미 제국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코카콜라, 맥도날드, 그리고 미국 영화와 같은 미국 상품의 우수성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태도는 가장 반미적인 국가나 집단에서조차 발견된다.
동계올림픽에서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의해 금메달을 강탈당했을 때 네티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미 정서를 부추기며 미국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자고 역설했지만 그로 인해 맥도날드나 스타벅스의 매출이 크게 타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너도 나도 자기 자식은 미국 시민을 만들어 보겠다고 만삭이 된 배를 움켜쥐고 태평양을 건너가 아기를 낳는 열풍이 번지는 것을 보면 겉만 다를 뿐 생각이나 행동까지 모조리 미국식으로 만들어버리는 미국 문화의 위력이 과연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이 세계의 군사ㆍ정치ㆍ경제적 강대국이 된 이후로 미국 문화는 처음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인들이 활동하던 나라들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강한 자의 문화가 약한 자의 문화를 침범하고 삼키는 것은 역사를 통해 목격되어 온 바이지만, 미국 문화가 이토록 강한 침투력을 가지면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 단지 그러한 정치적인 힘 때문일까.
미국식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저변에는 합리성과 실용성이 깔려있다. 청교도주의의 근면함에 대한 강조, 끈기와 인내, 개인적인 재능이 꽃피울 수 있는 분위기는 미국을 현재의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힘이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문화상품 중의 하나는 바로 미국의 교육이었고, 개발도상국들의 인재들은 미국에서의 유학을 통해 미국적 사고방식과 문화를 흡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그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미국 문화는 이처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전파되기도 했지만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 문화의 형태로 광범위하게 세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더글러스 켈너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오락은 때로 매우 커다란 즐거움을 주면서 시각과 청각 그리고 스펙터클을 이용하여 수용자들을 어떤 관점이나 태도, 감정, 입장 등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영화의 흡인력과 호소력도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에 대한 어필을 통해서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가족의 가치, 사랑, 정의, 휴머니즘 등은 미국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이러한 보편성은 다른 나라의 영화 관객을 매료시켰다.
여기에 수십년 동안 다듬은 촬영술과 테크놀로지, 스타 시스템을 통해 발굴한 스타들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그러나 영화는 제작자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생산한 상품이며 당연히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백인 남성이라는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영화와 함께 팝송이나 잡지, 광고 이미지 등의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던 미국 문화는 무역장벽이 낮아지고 세계화의 열풍이 불면서 다국적 기업의 형태로, 유명 상품의 브랜드로, 맥도날드나 피자헛과 같은 패스트푸드로 생활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제 의류로 몸을 감고, CD로 팝송을 들으며, 영어회화 학원에 가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집에 와서는 MTV과 ‘프렌즈’ 같은 미국의 인기방송극을 보는 젊은이의 모습은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다.
미국이 판매하는 최대의 문화상품은 영어이다. 아이가 우리말을 배우기 전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부모들은 밤을 새워가며 영어 유치원에 줄을 서고 영어교육을 위해서는 가족이 헤어지는 아픔도 기꺼이 겪는다.
미국 문화는 마약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도 수입되어 밤마다 젊은이들은 엑스터시에 취해 도리질을 한다. 세계화는 다름 아닌 미국화(Americanization)가 되었다.
이처럼 미국 문화의 폭격을 당하는 나라들에서는 획일적이고 상업주의적인 미국 문화가 자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저질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리처드 호가트는 “과거도 없고, 진정한 문화도 없는, 경쟁과 이윤과 소유욕으로 움직이는 나라의 번지르르한 야만주의”가 영국 청소년에게 미칠 해악을 우려하였다.
자동화한 공정에서 대량으로 상품을 찍어내는 미국이 문화 또한 산업화하여 표준화하고 그것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고 있다는 우려는 아도르노나 호크하이머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미디어 헤게모니 이론이 문화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반론 또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획일화한 미국 문화가 아무리 강요되고 확산된다 하더라도 각각의 문화는 나름대로의 수용 방식과 전통을 통해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창조적으로 전유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존 톰린슨은 문화적 제국주의가 전지구화(globalization)에 의해 대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지구상 지역 간의 상호연결, 상호의존”을 전지구화의 특징으로 들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60년대 70년대만 해도 젊은 층들이 주로 팝송을 많이 들었으나 서양 음악을 바탕으로 토착화한 한국 가요가 음반 판매량이나 방송 인기도에 있어 앞서고 있다.
한국 영화의 질적ㆍ양적 부상이나 토착 브랜드의 햄버거가 맥도날드에 밀리지 않고 선전하는 것을 보아도 모든 국가가 상업적이고 획일적인 미국 문화를 무분별하고 무방비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또한 획일화한 미국 문화라는 개념 자체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세계에 유통되는 문화상품들은 거대기업에 의해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생산된 것이지만 미국의 정체성 자체가 용광로(melting pot)가 아니라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메타포로 표현되는 오늘날, 미국 문화라고 할 때 그것이 어떤 미국 문화인가가 논란이 되는 것이다.
인종, 계급, 젠더가 미국 문화 연구의 쟁점으로 떠오르며 다문화적인 속성이 부각되고, 미국 문화가 시대의 변화와 정치적 분위기를 민감하게 반영한다고 볼 때, 60년대 이후 계속되어 온 혁신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을 겪으면서 변모해 가는 미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미국 문화의 색깔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아울러 세계 곳곳에 깔려 있는 인터넷은 거대한 단일의 원천에서 강요되는 이데올로기와 메시지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방향이 아니라 다자간, 다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처럼 “새로운 탈중심화된 전지구적 네트웍”을 형성하여 새로운 미국 문화의 지평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형식(李亨植)ㆍ건국대 영문학과 교수
■아메리카 핸드북 / 흔들리는 디즈니 왕국
지난해 12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월트 디즈니는 할리우드 성공담의 압권이다. 가난한 만화가였던 그는 1923년 형 로이와 함께 할리우드에 와 단번에 거대 미디어 그룹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제3세계에서는 언제나 미국 문화제국주의의 아이콘이었다.
최근 개장한 파리의 디즈니랜드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거센 반대운동을 불렀다. 알라딘의 램프가 개봉되자 아랍권은 등장인물 묘사를 모욕으로 간주하고 거세게 분노하기도 했다.
칠레의 도르프만과 마텔라트는 ‘도날드 덕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디즈니 만화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통해 “디즈니 만화는 가장된 순수성 뒤에 미 제국주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71년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에서 출판된 이 책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압수, 소각됐고 미국내 출판이 금지됐다.
미국 내에서조차 디즈니는 잦은 노사분규로 ‘검은 왕국의 건설자’라는 진보세력의 비판을 받았다. 66년 사망한 그는 인종차별적이고 백인만을 고용했으며 가혹한 노동조건을 강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디즈니 공식전기를 집필한 리차드 홀리스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디즈니는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중서부에서 태어나 공황기를 살았다”면서 “그에게는 부를 얻는 아메리칸 드림이 가장 중요했고, 그런 가치를 전세계에 전파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디즈니-ABC사는 여전히 세계 2위의 글로벌 미디어그룹이지만 위기의 조짐도 보이고 있다. 경쟁사 AOL-타임 워너 계열 워너 브러더스는 포케몬을 만들어 시장을 잠식해 큰 타격을 가했다.
이밖에 드림웍스, 뉴스코퍼레이션 계열 폭스사 등도 위협을 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테러의 여파로 테마파크 수입마저 급감, 한때 주가가 82%까지 폭락하기도 했다.
현재는 AOL-타임 워너와 함께 회계부정 의혹으로 증권감독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유승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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