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에 스파이박물관이 설립됐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인다.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19일 문을 연 ‘국제스파이박물관’은 중앙정보국(CIA) 간부 부부였던 안토니오ㆍ조나 멘데즈의 아이디어가 결실을 본 것이다.
냉전시대에 비밀요원이 모스크바에 침투할 때 그의 구두 뒷창 속에 숨겼던 비밀문서, 외투에 단추 대신 붙어있는 카메라 렌즈, 립스틱 모양의 일회용 권총 등 기발한 장치들이 전시되었다.
이 박물관 개관전 간판은 흡사 극장간판 같다. ‘스파이-임무 완수’라는 큰 문구와 두툼한 코트에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쓴 사나이 옆 모습이 그려져 있다.
멘데즈 부부는 이 박물관이 또 하나의 워싱턴 명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시대가 변하면 한 때 의미를 지녔던 물건들이 박물관으로 간다.
모든 역사적 기록이나 물건들은 박물관에서 용도가 바뀌어 새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박물관의 매력이다.
한국 박물관에도 최근 경사가 있었다.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 491점의 글씨유물을 기증한 이겸로 옹이나, 지난해 일본에서 국보급 석조(石造) 문화재 70점을 사비를 들여 환수해 온 천신일씨 등이 경사가 있게 한 주인공이다.
92세의 이 옹은 평생 서울 관훈동에서 책방 ‘통문관’을 운영하면서 모은 한국 중국 일본의 희귀한 서첩을 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세중 옛돌박물관 설립자인 천신일씨는 일본으로 밀반출된 문ㆍ무인석 등을 환수해 왔을 뿐 아니라, 지난달에는 석조 문화재가 빈약한 국립민속박물관에 24점을 기증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문화재를 한국으로 가져오려는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일본인 소장가도 마침내 “그렇다. 이것들은 한국에 있는 것이 옳다”며 동의했다고 한다.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세계 속에 한국에 대한 인지도와 이미지, 호감도를 확실하게 높였다. 그 기간에 문화인들도 우수한 문화전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팔을 걷어 부쳤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ㆍ일 국보 특별전’, 국립전주박물관이 동양의 정신을 보여준 ‘대(竹) 특별전’, 궁중 유물전시관이 황태자ㆍ비의 유품을 보여 준 ‘황실복식 특별전’을 열어 외국인을 불러 모았다.
또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한말의 풍경을 담은 사진전 ‘코리아 스케치전’과 ‘지구촌 문화 페스티벌’이 흥겹게 열렸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 근대회화 100선 특별전’을 개최하여 볼거리를 제공했다.
호암미술관의 ‘조선목가구 특별전’을 보며 장 마그나스 피스케쇼 스웨덴 왕립 동양박물관장 일행이 감탄을 연발하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월드컵 신화는 선수들의 노력 뿐 아니라, 뒤에서 우리의 문화적 전통의 힘이 함께 받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인들이 우리 문화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됐듯이, 우리 자신도 좀더 넓은 세계로 나와 지구촌의 문화 리더로서 성숙해졌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성숙함만이 세계의 문화시민으로 살아가게 하며, 문화를 고부가 유산으로 평가 받게 한다.
서울시는 월드컵에 맞춰 서울역사박물관을 개관하고, 시립미술관을 이전 증설하여 각국의 문화 손님을 즐겁게 맞았다.
우리는 문화산업시대, 문화상품시대, 문화전쟁시대를 살고 있다. 자국이 지닌 값진 문화를 자랑하고 교류하는 것만이 공존번영의 비결이다.
지금은 월드컵의 열기도 많이 누그러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는 뜨겁던 국민적 열기를 모아 축구박물관을 서둘러 건립해야 한다.
월드컵 이전에 대한축구협회와 박물관 건립문제를 오래 논의했고, 자료를 살펴보기 위해 축구회관도 방문한 바 있다. 자료는 다른 분야에 비해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박물관 건립을 추진할 때가 되었다. 박물관이 완성되어 우리를 한 달 동안 열광케 한 ‘붉은 악마’ 셔츠와 여러 문양의 태극기, “대~한민국” 함성 등을 다시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후손에게도 자랑스럽겠는가.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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