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아, 방안에 누워 있는 네 모습 너무 야위었구나. 마음으로 눈물 적시는 너를 보고 남몰래 따라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내가 아는, 온 국민이 생각해 온 이주일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제 아픔은 애써 감춘 채 남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주일아, 우리 옛날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기운을 차려 보렴.
너는 “박 감독의 인생은 눈물 없이는 차마 들을 수 없다”며 사람들에게 나의 고생담을 들려주곤 했다.
사실 나는 머슴살이 구두닦이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최고의 축구감독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그까짓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니. 나보다 편할 것도 없었던 네 인생을 돌아보렴. 코미디 황제가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그 험난했던 역정을 말이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는 없지 않니.
주일아, 사람들은 우리를 동년배 친구인 줄 알지만 사실 너는 3살이나 많은 나를 형처럼 따랐지. 우여곡절 끝에 춘천고 축구부에 들어간 나나 제 때 입학한 너나 이미 어린 나이에 고달픔을 온몸으로 참아냈었지.
우린 열심히 공을 찼고 너의 ‘끼’ 때문에 웃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는 ‘종환아’ 대신 항상 ‘박형’ 또는 ‘박 감독’이라 부르며 나를 대접해줬지.
내가 간기능 장애로 고생하던 때 기억나지. 1985년 8월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 준준결승에서 우루과이에 패한 이후 충격에 빠진 데다 감독 자질론이 나오면서 내 자존심은 무참히 짓밟혔다.
폭음과 신경과민으로 식사도 거르며 서너달을 지낸 뒤 병원을 찾았더니 “술을 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내쫓았지.
그래 우린 그 시절 정말 엄청난 술을 마셔댔지. 세계청소년축구 4강신화를 일궈낸 나나 최고의 코미디언이 된 너나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뤄냈지.
하루에 밤업소를 대여섯 군데 누비던 와중에도 나의 호출만 받으면 한달음에 달려왔고, 우린 추억과 세상사를 얘기하며 소주 열네댓 병은 거뜬히 비웠지.
안주를 먹지 않는 너에게 “속이 든든해야 버틸 수 있다”고 거들면 “박형이나 잘 챙기슈. 나는 끄떡없으니까”라고 너는 큰소리 치지 않았니.
네 말대로 내가 먼저 쓰러졌고 너는 “천하의 박 감독이 누워있는 게 말이나 되요. 술만 끊으면 금새 일어날 수 있다고 합디다”라며 위로했다.
네 말을 따라 독하게 마음먹고 2년 동안 술 끊고 몸을 관리하니까 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진 거 너도 알지.
그때 나는 나을 수 있다는 신념만 잃지 않는다면 세상에 못 고칠 병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9개월이나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나아진 게 없다”는 약한 소릴랑 제발 그만 두고 다부진 마음을 가져다오. 꼭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달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일씨가 완쾌되면 제일 같이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곤 한다.
글쎄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까, 옛날처럼 술로 회포나 풀까. 골프장에서 실력을 겨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스코어가 80대 중반인 너는 싱글 수준(핸디캡 5)인 나를 부러워했고 내기에서 질 때면 “다음에 두고 보쇼”라고 투덜댔지. 골프를 친 뒤 시원한 맥주 정도는 마실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주일아, 너는 내게 “누워서 생각해보니 따뜻하게 대했어야 할 사람에게 야박했던 적이 너무 많다. 신세진 사람도 적지 않은 데 아쉬운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지.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니. 너라고 나한테 섭섭한 게 없을 리 없고 나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하지만 그런 것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니.
주일아, 네가 한국일보에 ‘나의 이력서’를 연재하면서 격려의 편지가 쏟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일단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그런 다음에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못다한 아쉬웠던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자. 온 국민이 너의 쾌유를 빌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기 바란다.
/박종환 前축구국가대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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