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딴 기업회계 부정스캔들과 주식시장의 대폭락, 곤두박질치는 달러화…. 미국발(發) 금융불안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달러화의 우산을 벗지 못하고 있는 한국경제도 충격이 점차 가시화하는 양상이다. 전후(戰後) 세계경제의 유일한 소방수였고 지난 10년간 장기호황을 구가했던 미국경제가 왜 흔들리는 것일까. 회복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한국일보는 24일 현 경제위기의 원인진단과 대응방안을 모색키 위해 전문가 긴급좌담회를 마련했다. /진행=송태권경제부차장***참석자
전광우(全光宇)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정문건(丁文建)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박원암(朴元巖) 홍익대 무역학과 교수
▲전광우=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기하락의 성격에 대해선 시각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10년 장기호황 뒤에 거품이 꺼진다는 점에선 1920년대의 대공황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고, 반대로 안정적 성장으로 가기 위한 진통의 성격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현재의 미국경제가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 모습, 즉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확실성은 9ㆍ11테러로 야기된 안전위험에서, 불투명성은 엔론이나 월드컴 등 대기업 회계부정 스캔들의 확산 가능성에서 비롯됐습니다. 미국경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두가지 요인은 상당히 심각한 파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정문건= 2차 대전이후 미국의 경기 사이클은 주로 수요 요인에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시작된 이번 경기하락은 정보기술(IT) 거품의 붕괴, 즉 공급요인에 의해 비롯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요.
이는 20년대 대공황을 연상시키는 점이기도 해요. 다만 대공황은 기업파산사태가 통화 긴축 때문에 금융 시스템의 붕괴로까지 번진데 반해 지금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공격적 통화정책으로 위기확산을 막아주고 양상이지요.
▲박원암=경기순환 측면에서 미국경제 문제를 봐야 하고, 때문에 조정국면 성격이 짙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번 경기침체는 회복이 쉽지 않은 조정이 될 공산이 크다고 봐요.
▲정문건= 과잉투자문제가 쉽게 해소되기 어렵게 때문이겠지요.
▲박원암= 현재 미국경제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위기징후는 주가하락과 달러화 가치하락인데, 두가지 모두 원인은 보다 근본적인 곳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가하락은 회계부정 때문이고, 달러약세는 재정적자 때문이지요. 재정적자는 9ㆍ11테러 복구지출이 늘어난 데 일차적 원인이 있지만, 부시행정부의 감세정책에 따른 재정악화 가능성도 중장기적으론 달러화 약세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전광우= 미국은 전통적으로 재정적자를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 메워왔습니다. 나쁜 재정구조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본유입이 ‘강한 달러’를 지탱해줬던 셈이지요.
하지만 9ㆍ11테러 이후 형성된 안보상의 불안감, 아울러 미국 주식시장을 떠받치고 있던 신뢰가 엔론과 월드컴 스캔들로 무너지면서 자본유입이 중단되고 결국 ‘강한 달러’도 함께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1ㆍ4분기의 경우 미국에선 30억달러의 달러 순유출이 빚어질 만큼 외환수급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문건= 미국 경제의 신뢰상실은 세가지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회계부정과 내부거래등 기업스캔들로 야기된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입니다.
둘째는 미국식 신경제 모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신경제를 떠받치고 있던 IT 거품이 꺼지고 있지요. 여기에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고 모처럼 달성했던 재정흑자까지 다시 적자로 돌아서면서 1980년대 ‘쌍둥이 적자’ 로 돌아가는 양상입니다.
끝으로 부시행정부 경제팀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팀의 위기대처 능력을 국민과 시장들이 믿으려 하지 않고 있어요. 그린스펀 FRB의장의 발언조차 약효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행정부내 핵심인사들의 내부거래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불신감은 더욱 확산되는 양상입니다.
▲전광우=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빨리 드러내서 제거해야 합니다. 미국경제의 회복은 주식시장 환경이 얼마나 조속히 안정되느냐에 달려있는데, 이를 위해선 불확실성과 불투명성 이 우선 해소되어야 합니다. 비록 미국의 소비가 아직은 건실하다고는 하지만, 주식시장 침체가 지속되면 미국인들의 연금수입에 차질이 생겨 소비까지 위축시킬 공산이 크거든요.
그동안 미국경제 전망에 대해선 다소 낙관론이 지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미국경제가 자기복원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회복시기는 생각보다 늦어질 공산이 큽니다.
▲박원암= 미국경제가 공황이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달러가 100엔대까지 떨어지면 아마도 선진국들의 공조가 본격화하겠지요. 하지만 회복이 되더라도 상당기간은 불안이 지속될 공산이 큽니다. 예컨대 경기사이클이 침체국면을 벗어나더라도, 기업들의 수익이나 일자리는 별로 늘지 않는 형태의 회복(jobless recovery)이 된다는 얘기지요.
▲정문건= 하반기 미국경제 성장률은 2~3%대가 아닐까 합니다. 1%대에 머물렀던 작년보다는 낫겠지만, 5~6% 성장을 거둔 올 상반기보다는 나쁠 것으로 봅니다. 현재까지는 소비가 안정되어 있고, 신규 실업수당 신청건수도 줄고 있지만 기업들의 실적이 계속 악화하고 있고 주식시장 침체에 따라 부(負)의 자산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박원암= 하반기 미국경제 성장률이 3% 이상이 된다면 우리 경제도 6% 이상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미국이 2% 이하로 떨어지면 우리도 4%대 밑으로 내려갈 공산이 커요. 미국경제가 그런 것처럼, 우리경제 역시 큰 호황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광우= 우리 경제의 대외적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비관적으로만 볼 문제도 아닙니다. 요즘 미국에서 이탈한 자금이 아시아쪽으로 속속 유입되고 있는데, 아마도 돈이 갈만한 곳은 중국과 한국 밖에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 미국 주식시장이 빨리 회복되는 게 중요하지만, 경제체질 개선노력을 계속한다면 오히려 자본유입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문건= 환율변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중요합니다. 시장흐름은 막을 수는 없지만, 원화가 너무 고평가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지난해이후 정부의 거시정책기조는 경기부양쪽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갑작스러운 원화절상이 없었다면 하반기 성장률은 크게 높아졌을 것이고, 거시정책도 긴축으로 선회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환율변수가 생긴 만큼 긴축으로 가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기존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원화절상으로 악화한 기업의 채산성을 도와줄 수 있도록 환율ㆍ금리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합니다. 이런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미국경제도 2% 이상 성장만 유지한다면 우리 경제도 잠재성장률(5~6%) 정도는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원암= 5%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될 것 같습니다. 무리한 경기부양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거든요. 만약 과도하게 경기부양책을 펼 경우 당장 경상수지부터 적자로 돌아설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 경상수지가 적자기조로 접어든다면 외환시장은 아마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전광우= 금리는 현 기조를 유지하되 경기가 더 악화한다면 추가적 금리인하도 생각해야 합니다. 금리가 국제수준보다 높으면, 환율절상을 부추기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박원암= 그동안 원화 환율은 정부의 의도이든, 시장의 기대심리 때문이든 엔화에 대해 거의 10대 1 비율을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중국변수가 생긴 이상 ‘10대 1 신화’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중국 위안화가 절하효과를 보기 때문에 아무리 원ㆍ엔 환율이 10대 1을 유지해도 수출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만약 10대 1 환율이 수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11대 1, 12대 1도 생각해야 합니다.
▲정문건= 엔론사태의 교훈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란, 그것이 잘못 작동할 경우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 확인된 셈입니다.
▲전광우=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 경제의 체질개선일 겁니다. 기업은 경쟁력을 높이는 구조조정을 해야 하고, 금융기관도 수익성과 안정성 제고를 위한 구조개혁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특히 더 이상 외부충격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본시장은 안정된 수요기반을 확충하는 게 중요해요. 아울러 건전한 재정이 경제안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노사안정에도 유념해야 합니다. 최근 외국계 금융기관 인사들을 만났는데, 일부기업의 노조경영참여 문제에 아주 강한 우려감을 표시했습니다. 안정된 노사관계 없이는 국가경제가 결코 대외적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성철기자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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