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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8) 시인 신경림/"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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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8) 시인 신경림/"詩는 스스로 충만한 한그루 나무"

입력
2002.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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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 쓰는 일에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이다.내가 추천을 받은 시는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탄으로 허물어진 집이 즐비하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젊은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하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시가 우리가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는 시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무렵 우리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전통적 서정이 아니면 신이니 존재니 하는 관념이었던 터다.

그때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은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들이었다.

거기서 이미 알고 있던 백석의 ‘사슴’이며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의 시집을 구해 읽으면서 내 시에 대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지만, 특히 내 생각을 크게 바꾼 것은 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나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힌 것 같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때부터 만나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문학하는 친구들 대신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외국 사람들의 본을 따서 수요회라는 이름을 붙인, 말하자면 독서그룹으로였다.

이 모임에서는 새로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날 그날의 리더가 되므로 경쟁적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공산당 선언’ 같은 문서도 이때 처음 접한 것이다.

시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면서 문학 따위 하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살게 된다. 그동안 소설도 써보고 번역도 해보고 또 진로를 바꾸겠다고 엉뚱한 공부도 해보았지만,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살이를 계속할 능력도 내겐 없었다. 그럴 때 수요회의 한 멤버가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이 되었다.

겁이 많은 나는 무작정 서울을 탈출했고, 대학을 다니고도 밥벌이도 못하는 미운 털이 되어서 거의 10여 년을 시골서 떠돌게 된 것이다.

이미 아버지는 자식들 학비다 사업이다 해서 전답을 거의 팔아 없애 농사거리도 제대로 없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른 봄 마당에 있는 작약 뿌리를 다 캐 팔았겠는가.

유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시샘도 많은 할머니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보리밥만 한 사발씩 축을 내는 부자를 앞에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주먹질을 했다.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찾아가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막일이라고 내가 왜 못하랴, 나는 이런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내 현장 감독들과 술친구가 되거나 장부 정리나 해주는 보조가 됨으로써 먹물 티를 냈고, 결국 내 노동현장의 삶은 늘 단명으로 끝났다.

이것을 나는 아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돌리고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내가 먼저 먹물임을 내세워 편한 일자리를 찾음으로써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장돌뱅이 친구가 있어 나도 한번 해볼 것이라고 며칠씩 따라다닌 일도 있고, 그의 물건을 나누어 받아 따로 다녀보기도 했으나, 깨달은 것은 먹고 살기가 이렇게도 힘드는구나 라는 사실 뿐이었다.

시골살이 10년에 내가 제대로 밥벌이라도 한 직업은 아마 학원강사 또는 개인교수였겠는데, 이 일도 내가 종종 저지르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대개 뒤끝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나는 주위에서 무책임하고 싱거운, 이상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이 사이 나는 세상 공부를 다시 했다. 생각보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고, 장사고 노동이고 쉬운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땅은 사람 살기가 너무나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뿐 아니라 우리 역사가 할퀴고 간 자국이 너무 깊이 남아 있었다. 가령 어떤 동네에 가 보면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 집이 되었으며 또 어떤 동네는 온통 과부 뿐이었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하기도 하고 그 보복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 동네 살면서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사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내게 글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런 사람들의 정서, 설움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그 10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조각 같은 데 시를 끄적였으니 말이다.

그때 그렇게 끄적였던 작품이 ‘눈길’, ‘그날’ 같은 시다. 뿐 아니다. 고(故) 김관식 시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우리 서울 가서 함께 좋은 시 한번 써보자는 권고를 받았을 때 나는 환호작약했다.

그의 말에 큰 무게가 실려 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조건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상경해서 처음 쓴 시가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아 시에 대한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몇 해 동안 시골서 다시 글 쓸 기회가 오면 쓰겠다고 생각한 대로 시를 썼으니, 여기에는 내 시를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의 격려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이때 내가 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이 생각은 날이 가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이 무렵에도 나는 여기저기서 만난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렸는데, 이들의 생각과 떠돌이 생활 10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서로 같았다.

이때 쓴 시들이 시집 ‘農舞(농무)’에 들어 있는 시들이다.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나는 한동안 이 명제에 충실했다.

결국 반유신, 반군사독재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 시는 그 무기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이 드러나면 동료나 후배는 나를 문학주의자로 매도했다.

이 매도를 감수하면서 내 시는 경직되었던 것 같다. 문득 나는 시를 쓰기가 싫어졌고, 지루해졌다. 내가 민요에 몰두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자는 의도였는데,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지난날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있는 말이 되기 어려웠던 터이다. 80년대 전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시집 ‘길’ 속의 시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고지식하게 민요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민요에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란 명제도 그렇다. 그것도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새로 낸 시집 ‘뿔’의 후기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나무를 심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단 열매를 맺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보고도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들 무슨 상관이랴, 그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을 줄 것인데.

하지만 그 나무는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이 심은 나무요 키워낸 나무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점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연보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에 시 '낮달''갈대'등 추천 등단

-1967년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92~93년 작가회의 회장, 97~98년 작가회의 이사장

-1997년~현재 동국대 석좌교수

-시집 '농무''새재''달 넘세''가난한 사랑노래''우리들의 북''길''쓰러진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불'장시집'남한강'산문집'다시 하나가 되라''민요기

행''강따라 아리랑 찾아''시인을 찾아서''바람의 풍경'평론집'한국 현대세의

이해''삶의 진실과 시적진실' 등

-만해문학상(1975) 한국문학작가상(1981) 이산문학상(1991) 단재문학상(199) 대산문학

상(1998) 4.19문화상(2001)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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