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시집 잘 보낸 심정입니다.”서울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通文館) 주인 산기(山氣) 이겸노(李鎌魯ㆍ93) 옹이 최근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한ㆍ중ㆍ일의 서예, 고문헌 290건 491점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 기증했다.
70년 넘게 인사동을 지켜온 한국 고서계의 산 증인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적서승금(積書勝金ㆍ책을 쌓는 것이 금을 쌓는 것보다 낫다)’을 얘기했다.
“요즘은 고서 자체가 드물기 때문에 귀중본을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지요. 아름답고도 호방한 선인들의 글씨에 매료돼 서법에 관한 옛 자료를 하나둘씩 모았습니다.”
일일이 값을 따지기도 힘든 자료들의 기증은 우연히 이뤄졌다. 예술의 전당 서예관이 이 옹의 소장 자료로 전시회를 준비하던 중 박물관으로 승격됐다.
이 옹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시회 자료를 아예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자료들이 흩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김정희 한석봉 안평대군의 글씨, 중국의 왕희지를 비롯한 당ㆍ청대 명서가들의 필적과 금석문, 일본의 서도 잡지 등 방대하고 희귀한 자료들이다.
평남 용강 출생인 이 옹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17세 때 서울로 와 서점 점원 생활을 하다 1934년 금항당(金港堂)서점을 개업, 해방 후 통문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통문관은 이후 한국학 자료의 보고 역할을 했다. 역사학 국문학 고고학 민속학 서지학의 대가가 된 학자들 중 이 옹의 자료에 기대지 않은 이들이 드물었다.
‘월인석보’ ‘독립신문’ ‘월인천강지곡’이 그에 의해 수집, 발굴되고 영인본으로 남았다.
통문관의 경영은 손자에게 넘겼지만 그는 지금도 서점 2층에 상암산방(裳巖山房)을 마련하고 사람들을 만나거나 고서 전시회를 준비하는 건강한 현역이다.
“소장 서적이 1만 5,000여권 입니다. 어떻게든 우리 문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였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평생 서향에 취해 살아온 책방 주인의 부탁이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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