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양원영(65)씨는 1937년 함경북도 생으로 1945년 9월 월남해 한양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로 활동했다. 1997년 IMF로 된서리를 맞으면서 건축사사무소를 접고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겨 선린지라는 자연농원을 개발하며 평생의 꿈이었던 휴양지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선린지(善隣地)’는 ‘착한 이웃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24년 전 우연한 기회에 제주도에 들렀다가 구입하게 된 선린지는 3만평의 돌밭으로 이뤄진 황무지였다. 잡초와 돌로 뒤덮인 데다 약간 북쪽으로 기운듯한 경사진 황무지. 전기는 물론 수도며 전화도 없었고 도로도 엉망이었다. 식수도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받아먹을 정도였다. 그 황무지가 내 인생의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이 될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
구입 당시만 해도 이 땅을 가지고 딱히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평소 입버릇처럼 했던 “나는 환갑이 넘으면 어느날 갑자기 제주도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나 할까.
은퇴 후에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자연과 벗삼으며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농장을 나에게 판 사람에게서 서울로 편지가 왔다. 군에서 환경조성 차원에서 무료로 삼나무 묘목을 나눠주니 심자는 것이었다. 높이 약 40㎝, 굵기는 나무 젓가락 보다도 더 가는 굵기의 묘목들을 심으면서 나는 ‘이게 정말 나무 모양이 될래나?’ 의심스러웠다.
다음해 가보니 이 묘목들이 키가 150㎝가 넘는 건장한 나무로 자라나 있었다. 이렇게 잘 클 수가 있을까? 나무를 심어 이렇게 잘 큰다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그 후 나는 매년 이 황무지에 나무를 심었다.
묘목이든 성목이든 기회가 되는대로 구입해서 심었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자라기 시작했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설계사무실 운영이 어려워졌다. 마침 내 나이도 환갑이었다. 나는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던 ‘환갑이후 제주도로 사라지겠다’는 말을 현실화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다. 월남이후 쭉 살았던 서울 대신 제주가 나의 제 2의 고향이 됐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선린지를 휴양농원으로 가꾸는데 착수했다. 당시 IMF로 재정상태가 어려웠기 때문에 농장의 토지 일부를 친척과 형제들, 친지들에게 장래 노후생활공간으로 분양해 자금을 마련했다.
건축설계사 경력을 살려 직접 숙박시설을 짓기 시작했고 다섯 개의 콘도형 객실도 만들었다. 2000년 7월에는 숙박시설이 모두 9개가 되었고 드디어 ‘선린지 리조트’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선린지를 만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제주도 지역민들과 자연스럽게 융화하며 어우러지기까지는 제주도민 특유의 배타성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배타성을 극복하는 데는 그들이 인정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이제는 공무원들에게까지 나의 근면함이 알려져 이제는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선린지의 개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년 전에는 도시의 삶에 익숙한 아들내외가 제주도로 내려와 나와 함께 선린지를 가꾸는 일을 돕고 있다. 건축가였던 아들과 피아니스트인 며느리에게는 정말 고맙고 대견한 마음 뿐이다.
도시의 아스팔트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 수 밖에 없는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정년을 넘기고 나면 흙으로 돌아가 자연과 벗삼으며 남은 인생을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고 소망한다.
나 또한 그런 꿈을 갖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 선린지를 마주한 날부터 24년이라는 그 긴 시간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것 같다.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는 점에서 지금 돌이켜봐도 내 스스로가 대견스러우니 노후의 행복은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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