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린 시절 동화 속 꼬마 주인공은 보았다, 꽃도 풀도 새도 없는 세계를.땅만 열심히 바라보며 바쁜 걸음 걸이로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꼬마는 물었다.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세요” “말 시키지 마 바빠!” 그들에게 꽃, 나무, 새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에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마치 인간에겐 꼬리가 필요 없어 퇴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모두 집착 또는 삶에 대한 사랑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에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다. 교통사고로 배를 한번 가른 2년 후, 암 선고를 받고 직장을 드러내기 위해 또 한번 배에 메스를 가해 생긴 두 줄의 수술 자국
암 환자라는 생각보다, 배를 움켜 쥐고 고통받던 순간보다 더 큰 고통은 무슨 커다란 뱀무늬 같은 수술 자국을 안고 대중탕에 들어갈 때의 수치심이었다.
잠을 자다 무의식 중에 배위에 올린 손에 느껴지는 감촉만으로도 난 소스라치게 놀라 담배를 빼어 물었고 다시 살아난 기쁨보다 이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옛 시절의 모습들을 그리며 한숨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옛날에 비해 말수는 줄어 들었고,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인간이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내 주장보다 남의 의견을 경청하라는 오묘한 진리인 것도 알게 됐다.
나의 몸이 두 번 가위질을 당했어도 정신만은 잘려 나가지 않은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내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깨어 열린 가슴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집착에서 헤어남으로써 깨닫게 된 것이다.
월드컵 열기 와중에서 영화 ‘취화선’을 본 사람들 중에 “한국화를 찍었다” “경치를 아름답게 찍었다” “우리 문화를 찍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삶을 투영시킨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단지 화가로서의 삶이 아닌 예술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응될 수 있는 삶. 집착을 버리고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찍고 싶었던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일들은 많지만 병마에서 살아 남아 계속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잊을 수 없는 일은 없기에. 사랑을 하며 산다는 것,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 보다 더 큰 삶에 의미를 지니는 것도 없다.
/정일성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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