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 가난한 사람들의 하소연에 자주 접하는 편이다.“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시름에 찬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계의 수단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위험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 위험과 그 위험 속에서 겪는 인간적 모멸감은 안정된 생계 수단이 있거나 가진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겪은 후 이 땅은 바야흐로 자본의 본 때 앞에서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기업들은 무한경쟁 체제에서 살아 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고 정부는 차제에 온 나라가 이 새 질서의 엄숙한 요구를 체득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질서다. 이 가운데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한지(寒地)로 내몰렸다.
물론 그들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이 시행되었다. 어쩔 수 없는 대증처방이기는 했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어 과거보다 3배나 많은 150만명에 대하여 생계비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현 정권의 공덕 중 하나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해 어느 재개발 예정지역에서 만난, 혼자 사는 할머니 한 분은 나라에서 한 달에 26만원이나 대주고 있어서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정치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심지어 인간적 차원에서든 내가 보기에는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만이 유일한 지도원리로 작용하는 사회에서는 가난은 단지 열등한 경쟁력이나 저임금 노동시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과거의 가난은 그런대로 ‘저소득’ 이상의 무엇이었다. 거기에는 정치적, 사회적 울림이 있었고 더 나아가 만만치 않은 인간적 자존심도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경제 이외의 잣대들이 미약하나마 나름대로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잣대들은 단지 비효율의 축(軸)이 되어 신자유주의의 무식한 질주 앞에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자극을 잃어버린 시대의 자본은 엄청난 야만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지난날의 획일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자비한 획일성이 도사리고 있다.
마치 저 선사시대의 인류가 돌도끼를 휘두르며 멧돼지의 뒤를 쫓듯 우리는 그저 자본의 효율성만을 아무 생각 없이 뒤쫓는 ‘새로운 야만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물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먹는 희한한 세상에 대한 꿈은 이제 그 광간(狂簡)함을 드러내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든 그 세상이 현실적인 세상이라면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이처럼 적막한 무관심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란 무엇인가?
기부행위나 자선사업 같은 것인가? 아니면 진보적 정당에 대한 지지 같은 것인가?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날이 덥다가 보니 문득 이런 예가 떠오른다.
이를테면 냉방이 잘 된 방에 있는 사람이 냉방병이나 전력요금만 의식하지 않고 무더위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무더위보다 더 대책 없는 생계문제로 애태우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라도 의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그들에 대한 관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값싼 관심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 할 지도 모르지만 실은 그런 관심들이 무산되지 않고 살아 남아 삶의 당당한 가치 축으로 기능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 더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수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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