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미디어 제국이 흔들리고 있다.다채널 디지털 방송을 추진해 온 키르히 등 유럽 각국의 미디어 그룹들이 유로 TV 방송의 실패로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고, 세계 최대의 미디어 왕국인 미국의 AOL 타임 워너와 2위인 프랑스의 비방디 유니버설은 사상 최대의 적자 속에서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 미디어 그룹의 붕괴는 현대 산업의 총아인 미디어의 양적 팽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업계의 재편을 불러 올 전망이다.
▼몰락하는 유럽 미디어 재벌들
“방송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3월 말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 신청을 한 영국 지상파 디지털 방송사 ITV가 5월 1일 송출을 중단하면서 내보낸 사과방송의 자막이었다.
공영방송 BBC와 함께 영국의 지상파 방송을 이끈 쌍두마차였던 ITV의 쓸쓸한 퇴장은 유럽 민간 방송의 잇단 몰락을 예고하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독일 방송 재벌 키르히 그룹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방영권자를 따낸 키르히 미디어가 법정 관리를 신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키르히 페이 TV, 세계적인 자동차 레이스인 포뮬러원(F1)의 중계권자인 자회사 키르히 베타이리군그 등 주력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 보호절차를 밟고 있어 사실상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약 65억 유로(7조 5,600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는 키르히 그룹의 붕괴는 전후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도산으로 기록된다. 또 같은 달 26일에는 스페인의 디지털 지상파 방송 키에로가 6억 유로의 부채를 안고 도산했다.
프랑스의 자존심인 비방디 유니버설도 유료TV 채널의 위기에서 비껴서지 못했다. 비방디는 지난달 8일 부채 축소 계획의 일환으로 적자가 누적돼 온 유료 TV채널 카날 플뤼스(Canal+)의 이탈리아 자회사 텔레피우를 경쟁상대인 로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에 매각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비방디는 지난해 125억 유로의 카날 플뤼스 인수 비용과 카날 플뤼스의 경영 악화로 136억 유로 (16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앞서 장-마리 메시에 비방디 유니버설 최고 경영자(CEO)는 4월 16일 적자누적의 책임을 물어 2000년 합병한 카날 플뤼스의 CEO 피에르 레스퀴르를 전격 해고하는 등 자구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회사 주가가 13년 만에 최저를 기록하는 등 경영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자 그 자신도 이사회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왜 무너지나
유럽의 유로 채널 방송들이 파산과 적자 경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무리한 방송사업 영역의 확장 때문이다.
특히 축구 중계권료에 과다한 자금을 지출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지적된다. 영국 ITV 의 경우 3년간 축구 경기의 독점 중계권에 3억1,500만 파운드(5,827억여원)를 투자하며 고도성장을 모색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가입자와 광고 수입은 저조한 수준에 머물렀다.
키르히 그룹의 재정난도 과다한 중계권료 투자와 유료채널 프레미어레(Premiere)의 경영 부실이 최대 원인으로 꼽힌다. 키르히 그룹은 포뮬러원 중계에 10억 달러,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 중계권에 17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올림픽 중계료 상승에 자극받아 경쟁 입찰을 도입함으로써 월드컵 중계료는 1998년 프랑스 대회 때보다 10배 이상 상승했다. 그러나 유료 채널의 생명줄인 가입자와 광고가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침으로써 경영 부담이 커졌다.
요금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무료 시청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것도 한 요인이 됐다. 카날 플뤼스는 3월 호주 뉴스 코퍼레이션 산하의 요금 시스템 개발회사가 카날 플뤼스의 요금용 카드 암호를 해독, 1999년 인터넷에 공개함으로써 위조 카드의 보급을 촉진시켰다며 소송을 냈다.
카날 플뤼스의 유료 방송을 공짜로 볼 수 있는 위조 카드는 이탈리아에서만 3만장, 유럽 전역에서는 400만~500만장이 나돌아 총 피해액은 10억 유로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쌍방향 서비스의 불발도 작용했다.
영국의 ITV 디지털은 무료 이메일, 스포츠 전문 채널 B스카이B는 온라인 쇼핑 등을 부가 서비스로 판매했지만 데이터의 전송 속도가 느리고 판매 상품도 한정돼 시청자를 끌어 당기지 못했다.
▼미디어계 재편 예고
이들 미디어 그룹의 붕괴는 유럽형 디지털 유료 방송의 비즈니스 모델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유럽 각국의 방송사들은 1998년께부터 방송의 유료 디지털화 정책을 추진해 왔다. 고화질(HD) TV 방송 정책을 택한 미국에 대한 대응 전략이었다. 하지만 위성방송과 케이블 TV가 유료 시청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디지털 지상파 방송의 유료화는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방송사들은 가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출혈 경쟁을 벌여 경영 부실을 자초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평가이다. 이같은 시장 상황은 결국 미디어 업계의 인수 합병을 통한 시장 질서의 지각 변동을 낳을 조짐이다.
특히 거대 국제 자본이 파산한 방송 매체 인수전에 뛰어들어 국제 미디어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 키르히 그룹의 인수에는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미디어 셋, 일본의 소니 그룹 등이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또 키르히 미디어의 채권은행인 코메르츠방크를 비롯해 프랑스의 라가르디르와 TF1, 미국의 AOL 타임 워너 등도 키리히 미디어의 일부 또는 완전 인수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라나다 & 칼튼 커뮤니케이션이 반납한 ITV 디지털 허가권은 영국의 방송 규제기관인독립텔레비전위원회(ITC)가 4일 BBC컨소시엄에주기로 결정,영국의디지털 TV정책은 명백을 유지하게 됐다.그러나 BBC컨소시엄은 유료방송인 ITV디지털을 무료로 전환하기로 해 디지털 방송을 유로 TV로 정착시키려는 영국 정부의 정책은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김승일기자
ksi8101@hk.co.kr
■AOL타임워너 암담한 미래
시작은 창대했다. 2000년1월10일 AOL과 타임워너가 합병 선언을 했을 때 전세계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합병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전화선으로 인터넷에 접속시켜주는 서비스로 3,000만명의 회원을 확보한 AOL은 온라인의 절대 강자였고 CNN 타임지 워너브러더스영화사 등을 보유한 타임워너는 최대 미디어그룹이었다.
미디어왕국의 건설을 꿈꿨던 양측 경영진들은 타임워너의 풍부한 콘텐츠를 AOL의 막강 라인을 통해 내보내면 매년 33%의 성장을 하리라 굳게 믿으면서 계약서에 사인했다.
결과는 참담하다. 합병 당시 80달러에 이르던 주가는 9일 현재 14달러 수준으로 80% 이상 폭락했다.
올 1ㆍ4분기에는 광고수입 금감에다 합병 이후 자산가치 감소액을 모두 반영하면서 542억4,000만달러(70조3,5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적자를 냈다. 대규모 감원과 CEO 교체 등 뼈깎는 자구책을 내놓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결별설이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온-오프 결합의 시너지효과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와 전통 미디어의 ‘성격 차이’가 너무 확연한데다 덩치가 너무 커 시너지효과를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개봉한 ‘A.I.’의 흥행 결과가 대표적 예다. 계열사인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이 영화는 AOL이 초기 화면에 집중적으로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했다.
타임워너가 제공한 TV프로그램을 보면서 동시에 인터넷을 검색하고 인스턴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쌍방향 AOL TV 서비스를 도입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끝났다.
온라인과 콘텐츠의 결합에는 뜻밖의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AOL의 등록자들은 대부분 전화를 이용한 모뎀으로 온라인에 접속하고 있어 영화와 같은 대용량 서비스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다. 그 결과 타임워너가 제공하는 질좋고 다양한 콘텐츠들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특히 AOL보다 최고 25배 빠른 접속 속도의 초고속케이블 서비스가 경쟁적으로 늘어나고 이용료도 크게 떨어지면서 AOL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다 온라인에서의 눈부신 기술 발전과 미디어산업의 급격한 환경변화를 신속하게 쫓아가기에는 AOL 타임워너의 몸집은 너무나 비대하다.
‘전체는 각각의 합보다 크다’는 명제는 미디어산업에 관한 한 재검증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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