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월드컵 대회를 치른 뒤에도 정치권은 물론 검찰 경제계 등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부정 부패에 연루돼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특히 민선 3기의 출발과 함께 갓 취임한 서울시장의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한 여러 행태를 보면서 시민은 씁쓰레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갑작스런 산업화의 과정에서 ‘성공 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와중에 전문적인 식견과 균형 잡힌 인품을 갖춘 공인이 될 만한 인물들을 우리 사회가 길러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마저 생겨난다.
공적인 임무 수행을 통해 공공의 이해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공인은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지금보다 문화면에서 뒤쳐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인 전근대에 산 지배 엘리트들은 공사를 구분하는 의식이 부족했거나 없었다고 여겨질 만도 하다.
하지만 그 때에도 왕권이나 관리로서의 권한을 공적인 것으로 여기는 의식은 있었다. 오히려 추상같이 공사를 구분하고 때로는 지나치다고 여겨질 만큼 공사를 가렸던 예가 적지 않다.
당나라 군사와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을 국법에 따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유신 장군의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당시 문무왕은 원술 혼자서 패전의 책임을 질 일이 아니라며 용서했으나 김유신 장군은 끝내 아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 지소부인 역시 남편이 죽은 후에도 남편의 뜻에 따라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인과 그 가족이 공동체의 질서와 스스로의 품위 유지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화로, 당시 신라 사회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사회의 공인, 특히 선거로 선출된 공직자에게는 전근대사회의 관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공인의식이 요구된다.
왕이나 타인의 의사에 의해 임명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선거에 나가 공인으로 헌신하며 살 것을 다짐하고 유권자로부터 권리를 위임 받았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새롭게 공인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우선 공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취임한 그 자리가 다른 후보와의 경쟁을 통해 얻어낸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직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많은 유권자들로부터 위임 받은 것으로, 그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자리에서 오는 권한도 많은 시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것이라서 엄숙한 것이며, 처신도 시민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의 됨됨이에 대한 반성과 점검을 수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거에 자신의 목표나 사익을 위해 취해온 행동 양식이나 철학을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공공의 선에 합당한 것인지를 늘 점검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또 필요할 경우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고치고 수정하여 공무수행에 임해야 할 것이다.
공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한다면 ‘자신의 공적’을 남기기에 연연하지 않고 사적인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선거 기간에 유권자에게 한 공약과 임기 중에 하고자 하는 일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후대의 이익에도 맞으며 역사적으로도 올바른 것인 지 심사숙고 하는 자세로 행정을 펴나갈 것이다.
민선 3기 자치단체장과 의원들은 이전 선거와는 달리 엄청난 월드컵 열기와 열광 속에 공직을 맡게 됐다.
다소 경황이 없는 중에 기대하지 못했던 승리를 얻은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승리나 월드컵 신화에만 미련을 갖지 말고, 그 성과를 일궈낸 원인과 과정을 냉철히 분석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필요하면 전근대에 쓰여진 책이지만 ‘목민심서’라도 읽어보며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월드컵 영웅 거스 히딩크 감독 못지않게 나라를 위해 공적을 쌓은 공인으로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일이다.
/김기흥 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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