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달러 약세가 수개월째 이어지면서 세계 경제지형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달러가치 추락이 다른 나라들의 통화 강세로 이어지면서 국제자금의 이동경로가 바뀌고, 세계 수출시장 판도도 지각변동 기류에 휩싸였다.통화가치의 강세는 국가 경제력이 좋아졌다는 신호이지만 수출 경쟁력과 경상수지 악화라는 부작용을 동반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각국 경제의 부침,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질서의 재편으로 연결된다.
우선 작년까지 미국으로 쏠리던 국제자금이 최근 달러의 매력이 시들면서 유럽이나 일본 등으로 진로를 수정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4ㆍ4분기 1,507억달러의 국제 자금이 순유입됐던 미국의 경우 올 1ㆍ4분기 994억달러 순유입에 그쳤고, 달러 약세가 본격화한 2ㆍ4분기에는 그 규모가 더욱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유럽연합(EU)과 일본에서는 외국자본 유입 규모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
특히 유로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유로화와 달러 가치가 1대1 비율에 이르자 유럽은 오랫동안 갈망해온 ‘세계 경제의 중심’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는 표정이다. 역외 수출의존도가 10%대에 불과한 이 지역 국가들은 유로화 강세에 따른 수출타격은 미미한 반면 물가는 안정돼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동아시아에서 약한 달러 덕분에 가장 뜨고 있는 나라는 고정환율제를 사용하는 중국과 말레이시아. 외국 화폐의 강세로 가만히 앉아서 위안화 절하 효과를 보고 있는 중국은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시장 확대 기대에 부풀어있다. 특히 중국은 막대한 잉여노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출증가→고용확대’로 인한 인플레 압력도 적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화 가치(연말대비 절상폭 9.4%)가 일본 엔화(9.7%)와 비슷한 속도로 오르면서 일본에 대한 수출경쟁력은 유지하고 있으나 중국은 물론 통화가치 절상 폭이 4.3%, 4.4%에 불과한 대만, 싱가포르에 대한 경쟁력은 크게 떨어졌다. 모건스탠리의 이코노미스트 엔디 시에는 “한국이 달러 약세에 따른 부작용의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더 큰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지목한다. 미국에 등을 돌린 국제자금의 유입이 다소 늘고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금융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투자유인에 한계가 있는데다 엔화 강세로 수출경쟁력에 큰 타격을 입어 경제회복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와 대만은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수출경쟁력 우위를 지킬 수 있으나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대해서는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해외부채 비중이 높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은 달러 약세로 부채가 경감되는 효과를 보고 있다.
금융계 관계자는 “달러화 약세 등 미국의 금융불안이 실물경기회복 지연으로 연결될 경우 일부 동아시아 국가를 비롯한 다수 국가들이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면서 세계 경제질서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남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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