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인물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었다. 그들 중에는 답답한 세상을 뒤엎으려 한 이도 적지 않았다. ‘홍길동전’을 쓴 허 균(許 筠ㆍ1569~1618)도 그 중 한 명이 아닐까.허 균의 일대기를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린 ‘허균평전’(돌베개 발행)이 연세대 국문학과 허경진(50) 교수에 의해 출간됐다.
허 균이 남긴 글과, 거기에 담긴 생각을 차근차근 짚으면서 그의 생애 전체를 복원했다.
“허 균은 한 측면만으로 접근해서는 실체를 파악할 수 없어요. 혁명가 문장가 평론가 사상가 등 다양한 면모를 지녔기 때문이지요.”
허 균은 소설뿐 아니라 한시 비평 논설 등에서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렸다.
유교윤리에 집착한 사대부의 편협한 시각을 탈피, 불교 도교 천주교를 수용했으며 소외된 백성의 입장에서 새로운 정치사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단아 취급을 받았고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다.
그런 허 균을 저자는 ‘때를 잘못 만났기에 용이 돼 하늘에 오르지 못한 이무기’로 비유한다.
저자는 “출세가도를 포기한 것도 그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아버지 허 엽(許 曄ㆍ1517~1580)은 서경덕(徐敬德)과 이 황(李 滉)의 제자로 대사성과 경상도 관찰사에 올랐다.
큰 형 허 성(ㆍ1548~1612)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선조가 세상을 뜰 때 아들 영창대군의 뒤를 맡길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둘째 형 허 봉(ㆍ1551~1588)과 난설헌이란 호로 알려진 누나 허초희(許楚姬ㆍ1563~1589)도 당대의 문장가였다.
장인 김효원(金孝元)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허 균도 아홉살 때부터 시를 지었고 영특하다고 소문났기 때문에 출세길이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분방한데다, 시에는 능통하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로 세상에서 소외된 스승 이 달(李 達)을 보면서 신분제, 나아가 유교사회의 모순을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깨부수려는 거사를 도모한다.
물론 거사로 이루려 한 세상의 실체는 분명치 않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할말이 있다”고 외쳤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데다 역적으로 몰림으로써 사회 개혁과 관련한 그의 기록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역시 특권층이었기에 봉건사회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면서도 “서얼 노비 말단관리 승려 등 소외층을 거사에 끌어들인 것은 신분 차별없는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책이 그리는 인간 허 균은 ‘거리낌 없고 솔직한 사람’이다. 유교 사회임에도 불구, 삼척부사로 부임한 뒤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불경을 읽고, 승복을 입은 채 부처에게 절했다.
모친의 3년상 기간에 기생과 어울렸고 기생과 잠을 잔 날에는 일기에 그 이름을 기록할 정도였다. 저자는 “허 균이 당대의 윤리를 의도적으로 깨뜨렸다”고 분석한다.
연세대 국문학과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허 균의 작품세계와 인간성에 매료됐다는 저자는 “관련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면 그것들을 모아 좀 더 완벽한 평전을 써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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