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제 열정 없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정념의 열기가 독자의 살을 데게 할 것 같았던 소설가 전경린(41)씨다.단편 2편을 실은 ‘첫사랑’(봄출판사 발행)에서 전씨는 “이제 할 수 있다면, 남은 생은 완전히 사랑의 열정이 배제된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열정 없이, 상처 없이, 드라마 없이 마치 관념과 같이 평온하게 살고 싶다. 생의 질료를 탕진해버린 사진 속의 정제된 여자처럼, 모든 욕망을 침묵 속에 이미지로 가두어놓고 싶다.”
‘욕망을 이미지로 가두어놓고 싶다’는 얘기는 그의 새 책의 형식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첫사랑’은 출판사가 기획한 ‘누벨디마쥬 시리즈’ 세번째 권이다.
누벨디마쥬(nouvelle d’image)란 ‘이미지로 쓴 소설’이라는 뜻으로, 사진과 소설이 어우러져 새롭게 만들어진 텍스트를 의미한다고 출판사는 설명한다.
사진작가 계동수씨가 찍은 40여 장의 사진은 독자가 편안하게 문자를 영상 이미지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에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길,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하늘,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듯 싶은 바다, 피로하게 잠든 모습에 깨우는 것이 한없이 죄스러울 것 같은 여자….
그리고 전경린씨의 신작 ‘첫사랑’이 있다.
“첫사랑이란 실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억눌린 감정에 관한 추억이다.” 소설의 서늘한 힘은 이런 것이다.
삶의 진실이 문자로 명료하게 드러날 때, 그것을 읽는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첫사랑’은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으며 시장에 들러 전복을 사는 것이 일과가 된 30대 여자 은무가 돌아보는 첫사랑 이야기다.
유치원에 다닐 적에 만났던 남자아이 하록은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은무에게 잠깐씩 엷은 기억을 남겼다.
고등학교 때 은무는 키가 너무 커버려 더 이상 기계체조를 할 수 없는 하록을 다시 만났다. 체조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던 하록은 겉돌기만 하다가 늪에 빠져 죽었다.
은무의 회상은 그게 전부다.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걸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호한’ 기억이었다.
뜨거운 열정이 넘쳤던 전씨는 이제 감정을 조심조심 짚는다. 사랑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희미한 느낌.
그 느낌을 기억하면서 갖는 아련한 심정. 움직임이 적은 사진들은 전씨의 소설만큼이나 애틋하다.
‘전경린’이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단편 ‘염소를 모는 여자’다. 전씨는 신작 ‘첫사랑’과 함께 이미지화하고 싶은 소설로 출세작 ‘염소를 모는 여자’를 선택했다.
1996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을 그는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
아파트에서 염소를 모는 여자 윤미소의 일탈을 꿈꾸는 내면은 섬뜩한 것이었다.
아파트 계단과 검은 염소와 흰 치마를 입은 여자의 지독한 어긋남을 사진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확실히 전씨의 상상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염소를 모는 여자는 그 자체로 광기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마음도 몸도 가난했지만, 가난을 모를 정도로 자긍심이 있었고 오직 언어만이 목적이었으며 짐승처럼 단순하고 참 맑았다.”
그는 그 맑았던 시절의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와 침묵 속에서 평온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된 최근의 작품 ‘첫사랑’을 함께 묶어 독자에게 선물한다.
그간 얼마나 깊은 감정의 강물을 건너왔는지 한눈에 가늠할 수 있어 문득 아득해진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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