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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3)성숙한 시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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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3)성숙한 시민의식

입력
2002.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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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기발견…'6월의 선물'소중히“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연인원 160만명이 모여든 경기장에서, 2,100만명이 집결한 길거리에서, 그리고 600억명이 TV로 주목한 한반도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역대 월드컵 최고의 호스트였다.

남녀노소를 떠나 “대~한민국”으로 하나된 길거리 응원단은 근원을 헤아리기 힘든 열정에 절제미를 겸비, 세계인이 눈을 비비도록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앞장선 자원봉사자의 물결, 90%에 가까운 차량 2부제 참여 등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했다.

▽정열 절제 겸비한 붉은 물결

잉글랜드 등과의 평가전서 점화돼 본선 한국전 7경기를 통해 활활 타오른 길거리 응원은 이번 월드컵의 백미(白眉)였다. 우선 수적으로 상상을 넘었다.

지난달 4일 폴란드전 50만명으로 시작한 응원인파는 연일 단군이래 기록을 경신, 25일 독일전 650만명으로 절정에 치달았다. 그리고 연인원 2,193만명이라는 전무후무한 군중 운집의 기록을 만들어냈다.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자발적으로 붉은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모습은 장관을 넘어 경이로움 마저 느끼게 했다.

7차례 길거리 응원전에 모두 참여했다는 대학생 한태석(韓泰錫ㆍ21)씨는 “즐거움 이상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뭔가가 나를 매번 길거리로 잡아 끌었다”고 말했고, 회사원 이기현(李起鉉ㆍ34)씨는 “붉은 옷을 맞춰 입고 하나된 모습은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감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열광의 현장은 경기가 끝나면 이내 평온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10일 한ㆍ미전 당시 길거리 응원단의 성숙한 모습은 격앙된 반미감정이 반미시위로 이어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했던 당국을 머쓱하게 했다.

시민들은 절제된 대열 속에서 열정을 발산했고 깨끗이 퇴장했다. 이런 모습에 유수 외국 언론들은 “하나돼 응원을 벌이는 모습도 놀랍지만 수많은 인파들이 흥분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붉은 옷 입은 신사들

붉은 옷의 시민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누구랄 것도 없이 자기 자리를 정리하고 쓰레기부터 치웠다. 경기장에서도 2,3중 보안검색에 출입구마다 수십명 이상씩 길게 늘어섰지만 짜증내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고, 경기 후에도 질서 정연한 퇴장 모습을 보여줬다.

이종규(李鍾奎ㆍ29)씨는 “경기장에서 보여준 관중들의 모습은 다른 나라가 아니냐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월드컵 개최 도시에서 실시된 차량 2부제도 한단계 높은 의식수준을 보여줬다. 2부제가 처음 실시된 5월 30일 서울의 참여율은 92.7%였으며 이후 부산, 광주, 대전 등 대부분의 도시에서 참여율은 90% 안팎을 유지했다.

또 다양한 계층의 자원봉사자 13만여명이 참여, 아무런 대가 없이 숨은 노력을 기울여 월드컵에 광채를 더했다.

▽선진 시민의식 일상화해야

하지만 옥의 티는 있었다. 한국 경기의 티켓이 무려 10배가 넘게 암거래된 데 비해 다른 나라간 경기에는 빈 자리가 적지 않아 개최국 국민으로서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거리응원단의 도로점거 나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자동차 세리머니, 폭죽 등으로 인한 안전사고 역시 지적하고 넘어 가야 할 부분이다.

또 진정한 선진질서 의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월드컵에서 보여준 시민의식이 일상생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양대 사회학과 한태선(韓泰善) 교수는 “외부에서 온 ‘선의의 적’(상대팀)을 앞에 두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우리민족 특유의 정서가 열정적 응원문화와 시민의식으로 나타났다”며 “하지만 다시 ‘우리끼리’가 됐을 때 이런 의식이 지속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일상화하기 위해서는 사회지도층의 선도적 모범이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되돌아본 길거리 응원

전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2,200만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월드컵 ‘길거리 응원’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졌던 한국 사회를 신선한 방식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해방이후 반세기동안 끊이지 않았던 분열과 반목을 길거리 응원의 함성으로 녹여버렸고 이념과 지역, 계층, 세대, 성별 간 갈등을 한민족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담아냈다.

특히 응원인파의 절반이 넘은 여성참여는 획기적이고 폭발적이었다. ‘운동보다는 운동가(歌)를 좋아했다’는 최영미 시인의 1980년대 학생운동시절에 대한 고백처럼 , 여성들은 ‘축구보다는 응원’을 마음껏 즐겼다.

일상의 억압에서 빠져나와 사회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참여, 일탈과 해방감을 만끽한 것이다. 더욱이 태극기를 이용한 탱크탑 등 기발한 패션은 게양대에나 올라있는 국기에 대한 불신과 거리감을 신뢰와 사랑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길거리의 대형스크린은 비싼 입장권이 없어도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계층파괴적’ 참여문화를 주도했다. 80년대의 길거리 민주화투쟁과 2002 한일월드컵 길거리 응원이 확연하게 차이를 보인 것은 ‘분노의 표출’에서 ‘신바람 놀이’로 변화했다는 점이었다.

경찰 추계에 따르면 7차례의 한국경기에서 길거리 응원에 나선 ‘붉은 인파’는 전 국민의 47%에 이르는 2,193만명.

폴란드전 50만명을 시작으로 미국전 77만명, 포르투갈전 279만명, 이탈리아전 420만명, 스페인전 500만명, 독일전 650만명, 터키전 217만명 등이었다.

프로축구 1년 관람객 총수가 300만명에 못 미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인구비례로 따져도 1919년 3ㆍ1운동 3개월간 202만여명, 87년 6ㆍ10 항쟁 때 140만여명과 비교해볼 때 압도적이다. 수도 서울의 경우 시민의 88%에 이르는 연인원 1,048만명이 운집했다.

외국 언론 역시 한국 국민들의 대규모 길거리 응원에 당황하고 감탄했다. 한 외국 언론은 “(북한처럼) 한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빨간 옷을 입혀 강제로 동원한 것 같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조재우기자

josus62@hk.co.kr

■일본인 유학생 오오카씨

“붉은악마들에게 홀딱 반했어요.”

지난 4월부터 한국에서 유학중인 오오카 타카꼬(28ㆍ여ㆍ고려대 박사과정)씨.

한국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서울시청 앞이나 광화문으로 뛰어 나갔던 그는 “일본에는 없는 온 국민의 단결된 응원문화가 처음에는 흥미롭고 재미있었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팀의 승리 때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리의 젊은이들과 어깨를 걸고 얼싸 안으며 함께 승리의 축제를 만끽하다 보니 자신도 어느새 한 명의 붉은악마가 돼 버렸다.

심지어 터키와의 3ㆍ4위전 때는 빠듯한 유학경비를 쪼개 입장권을 구입, 대구까지 내려가 목이 쉬도록 “대~한민국”을 외치기도 했다.

그가 매료된 결정적인 원인은 응원 후 붉은 악마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 때문. “경기가 끝난 후 스스로 쓰레기를 줍더라구요. 처음에는 아르바이트생인 줄 알았어요.”

그는 한국에 오기 전 까지는 ‘한국 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피워 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의 ‘놀라운 단결력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직접 목격한 후 더 이상 편견은 없다”고 털어놓았다.

“일본에서는 안전문제 등을 내세워 길거리 응원에 대한 규제가 많다”고 아쉬워 하던 그는 “정부, 붉은악마, 시민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 놀라운 응원으로 선수들에게 엄청난 기운을 몰아준 덕에 한국 대표팀이 선전한 것 같다”고 잠시 부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누구에게나 벽을 허물고 함께 손을 흔들며 한 목소리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니 한국사회가 누구에게나 열린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이 곳이 낯선 이국 땅이라는 생각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며 웃어 보였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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