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해 만들었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극장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은 부모들이 적잖게 눈에 띄었는데 영화에 깊게 빠져드는 것은 아이들보다는 부모 쪽이었다.
치히로는 투덜이 소녀. 이사하는 것이 싫었고, 이상한 터널로 들어가는 것도 두려울 뿐이다.
게다가 부모가 갑자기 돼지로 변한 후 미소년 하쿠가 나타나 돕지만 그것마저 어안이 벙벙하다.
가마할아범이 온천 주인 마녀인 유바바를 소개시켜 주었는데도 치히로는 아무 말없이 나오다 “인사할 줄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듣는다.
온천에 취직한 치히로는 마루 바닥에 윤을 내거나 더러운 욕실을 청소하는 것, 그리고 어른이 얘기할 때 공손한 자세로 듣는 것,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운다.
치히로가 취직한 온천은 일본적 봉건 사회의 룰이 가장 엄격하게 지배되는 위계질서의 축소판이다. 귀한 신들은 모두 남자 신이며, 여성들은 모두 밥을 하거나 욕실을 닦는 온천장 직원들이다.
지엄한 마녀 유바바조차 오물신으로 오인된 강(江)의 신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자 외면하는 직원들을 항해 “손님께 절대 모욕감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호통치며 극진한 자세로 대접한다.
직분에 충실할 것, 손님과 상급자에게는 절대 복종할 것…. 치히로는 이런 가치도 배웠을 것이다. 물론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려는 감독의 의도는 충분히 보인다.
그러나 대속(代贖)의 짐을 어린 치히로에게만 지운 것은 아무래도 억울하다.
남의 물건을 탐내고, 욕심을 부리며 환경을 오염시킨 것은 부모인데 돼지로 변한 그들은 아무 고민없이 밥만 먹어대기만 하고, 치히로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한다.
치히로가 부모를 구하는 과정은 ‘요즘 아이들’ 같던 치히로가 ‘요즘 아이들 답지 않게’ 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2,400만명의 관객이 든 것은 어른들이 2시간 30분 동안 효과적인 ‘가정교육’이 된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을 끌고 간 때문은 아닐까.
미야자키 감독 역시 영화를 본 아이들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부지런히 살겠어요”라는 상투적인 감상문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검정 대신 빨간 구두를 산 소녀가 며칠 몇 달을 춤만 추다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잘라낸다는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에 비하면 이건 너무나 휴머니즘적이기는 하지만.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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