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단말마적인 인권탄압이 극에 달했던 70년대 말이었다.제도권 교육기관을 떠나 거리의 교사를 자처해 학원강사로 연명하고 있을 때, 제적당한 제자와 함께 야간 강의를 나가다가 한 무리의 불량배에게 테러를 당했다.
제자와 호위를 겸하여 밤공부를 같이 나가는, 세칭 광주의 농장다리께서 우리끼리 주고받는 말을 트집잡아 그 불량배 일당이 폭행을 가해 왔다.
그들은 나를 지키려는 제자와 나를 날이 뾰족한 철제 우산대로 공격을 했다.
우산대로 제자의 눈을 찌르고 나를 시멘트 바닥에 쓰러뜨린 뒤 두부(頭部) 관자놀이 바로 위쪽을 때려 제자는 눈알이 빠지고, 나의 두부에 5㎝ 가량 파고드는 상처를 내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뇌수가 흘러나올 정도로 중상을 입혔다.
그 난투극 중에서도 태권도 유단자였던 제자는 그 중 한 명을 두 손으로 움켜잡아 놓치지 않았고, 나는 다리께 사는 제자의 집까지 달려가 최연석(현 목사) 정용화(현 5·18재단 총무)의 도움으로 범인을 경찰에 넘겼다.
또 그들의 도움으로 제자와 나는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응급처치 후 장시간의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제자는 시신경이 끊어져 봉합수술에 실패하고 실명하였으며 나는 관자놀이를 조금 피한 탓에 어려운 뇌수술을 받는 등 3개월여의 치료 끝에 어렵사리 정상을 되찾았다.
소변을 주사바늘로 빼내고 일시 수리(數理)장애까지 왔으나 신체장애나 두뇌활동 장애는 없도록 치유되어 ‘제2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10월26일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사건으로 유신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다시 신군부에 의해 제자와 나는 광주 5월 항쟁에 연루되어 또 한 차례의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광주의 5월 항쟁은 폭도의 누명을 벗었다. 당시 나와 함께 테러를 당했던 제자 황일봉은 이 시대 젊은 정치 지도자로서 6·13 지방선거에서 구청장에 당선됨으로써 목민관이 되었다.
눈까지 잃으며 고통의 시대를 살았던 그가 앞으로 선정을 베풀어 갈등과 고통을 평화와 사랑으로 승화시켜 주기를 바란다.
나는 정년 퇴임한 뒤 창작생활을 계속하면서도 그때 그 테러사건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문병란·시인·전 조선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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