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은 행선지를 영어로 적은 판자를 목에 걸고 미국으로 떠났다.옆자리 승객과 말 한마디 못 나눈 채 수십시간 비행기를 탔고, 호텔 밖을 돌아다닐 엄두조차 못냈다. 그리고 반세기가 흘러 낯섬과 동정이 뒤섞여 이방인들의 망막에 감지되던 ‘코리아’와 ‘태극기’는 당당한 2002 월드컵 주최국의 국호와 국기가 됐다.
‘촌닭’같던 한국인도 그 시간을 뛰어 넘어 연인원 600억명의 주목 속에 한달동안 호스트로서의 공손함과 축제 참여자로서의 열정을 과시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얼굴색, 언어가 다른 외국인들을 접해본 시민들은 “이제 당당한 세계시민으로서 자신감을 체득했다”고 입을 모은다. “월드컵을 한국인이 세계의 지평을 열고 ‘글로벌 시티즌’으로 거듭나는 전기로 삼아야 한다”는 제언고 이어지고 있다.
▼마음만 열면 다 돼요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어린이 도우미 활동을 한 전주 용흥초등학교 6년 전수지(全秀知ㆍ12)양. 전양은 월드컵을 위해 10개월을 준비하면서 ‘글로벌 시티즌’이 다 됐다.
매일 아침 영어 회화를 공부했고 전주의 명소를 소개하는 영어 문장 250개를 머리속에 담아두기까지 했다. 그래도 경기장 도우미로 나가기 전날 밤엔 잠을 설쳐야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7일 스페인-파라과이전이 열린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전양은 스페인 응원단과 함께 한 2시간의 즐거운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어려운 영어도 필요 없었어요. 그냥 마음만 여니까 다 되던걸요.”전양은 스페인 관광객이 선물로 건넨 스페인 국기를 꺼내보이며 마냥 자랑스러워했다.
주부 유은경(柳銀暻ㆍ33ㆍ서울 동작구)씨는 이번 월드컵 기간 벽안의 미국인과 홈스테이로 2주일을 함께 했다. 언어소통 문제 때문에 한참 망설인 끝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손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등산, 길거리응원도 함께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니까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어요.”유씨는 “이제 외국인은 좀 멀리 떨어져 사는 이웃 정도로 생각된다”며 환하게 웃었다.
▼다양한 세계에 관심을
단지 호기심에 세네갈 서포터즈에 자원했던 대학생 강명원(姜明遠ㆍ24)씨에게 월드컵은 다양한 세계에 눈 뜨는 계기였다.
인터넷을 뒤져 세네갈이란 나라에 대해 공부 하고 ‘알레(가자) 라 세네갈’구호도 연습했지만 어색함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립회관에서 세네갈인들과 조우하면서 어색함은 달아났다.
말은 안통했지만 그들의 민속춤을 따라하며 담뿍 친근감을 내보였고,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검은 얼굴위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날 좋은 기억 때문에 누구보다 열렬히 세네갈을 응원했다는 강씨는 “미국과 유럽 말고도 다양한 세계인이 공존하고 있음을 체감한게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대학생 김솔잎(23ㆍ여)씨는 “나와 남을 가르지 않는 것이 세계화”라며 월드컵에서 체득한 나름의 세계화관부터 설파했다. 그는 다양한 이방인들이 축구사랑 하나로 서슴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쌓아둔 편견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우리 자신감부터 키우자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李彦五) 상무는 “월드컵을 통한 다양한 세계화 체험이 미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를 전방위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넓여줬다”고 분석했다.
그는 “하지만 아직 한국인은 자기 중심적이고 우리 승리만을 강조하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각 분야의 실력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더해지면 진정한 세계시민으로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너가이드(예절교육강사) 정영주(鄭英珠)씨는 “오랜 농경문화 전통을 가진 한국인은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게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이런 거부감이 상당 부분 허물어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는 “여기에 생활속에 밴 자연스런 예절ㆍ질서 교육이 더해지면 친절하고 세련된 세계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외국인들이 본 한국인
축구경기 하나 때문에 붉은 옷을 입은 700만명이 거리란 거리를 모두 메우고 ‘미친듯이’ 열광하며, 울고 웃는 나라와 국민. 그런 한국,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문화적 충격 자체였다.
학원강사인 호주인 존 피터(35)씨는 “예의바르고 조용한 줄만 알았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폭발적인 힘과 열정을 지닌 전혀 다른 한국인을 만났다”고 놀라워 했다.
“처음 보는 내게 사진찍자고 제안하는 한국민은 열린 사람들이었다”이라는 캐나다인 크리스 피치(43)씨는 “한국의 4강 진출을 ‘심판도움’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은 붉은악마의 열기속에 들어가는 순간 한국이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오던 날 신호등에서 자신에게 우산을 받쳐주던 중년 한국인의 친절에 감명받은 미국 스포츠일러스트레이트의 그랜트 월 기자는 “나를 명예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불러달라”며 장문의 ‘한국에 보내는 러브레터’로 ‘애정’을 고백하기도 했다.
한국의 힘은 외국언론이 묘사한 ‘병정개미’와 같은 단합과 지칠 줄 모르는 끈기였고, 여기에 절제를 갖춘 것이어서 더욱 인상이 강했다.
2년째 영어강사를 하고 있는 미국인 존 더피(40)씨는 “그 많은 사람이 응원을 하면서 폭력사태가 없었다는 것은 유럽이나 남미에선 볼 수 없는 일”이라며 “끝난 뒤 쓰레기를 줍는 군중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강렬한 집단적 열정과 행동이 지닌 배타성과 편협성에 대해서는 경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인 관광객 요한 슈나이더(34)씨는 “한국인의 단합된 힘은 놀랍지만 너무나 승리에 집착하고 있다”며 “만일 한국이 16강 진출부터 실패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다”고 말했다.
3년동안 가구업체에서 일해 온 말레이시아인 모하마드 노르딘(28)은 “한국에서 차별을 받았지만 갈수록 정을 느낀다”며 “한국응원단이 외친 ‘아시아의 자부심’속엔 분명히 아시아인에 대한 사랑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김동국기자
dkkim@hk.co.kr
■ 홈스테이 제공 윤병길·김정숙부부
“우리 식구 모두가 이제 어엿한 안방 외교 사절이랍니다”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을 찾은 프랑스인 루생 스타미슬라(27)씨에게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있는 서울 양천구 목동 윤병길(尹炳吉ㆍ49) 김정숙(金貞淑ㆍ45)씨 부부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은 것 밖에 없는데 배우는 것은 너무 많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특히 두 딸 재희(載喜ㆍ고교 1) 다희(多喜ㆍ중3)양는 “루생과 같이 한 덕에 월드컵이 백 배는 더 즐거웠다”고 말한다.
재희와 다희는 한국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루생과 함께 붉은 티셔츠에 두건까지 맞춰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가 ‘다국적 붉은악마’의 위력을 과시했다.
특히 결승 진출을 놓고 독일과 대격전을 벌인 25일에는 온 가족이 루생과 함께 서울 상암동 월드컵 공원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앞에 자리를 잡고 소리 높여 ‘대~한민국’을 외치다 목이 쉬어 버리기도 했다.
재희양은 “축구 좋아하는 루생과 함께 경기를 봐서 더욱 신났고, 또 월드컵이 ‘전세계의 축제’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희네 집이 홈스테이로 외국인을 맞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머니 김씨가 지난해부터 국제 교류 단체 ‘렉스(LEX)’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외국 관광객들에게 홈스테이를 제공, 네덜란드, 홍콩, 일본 등 세계 각지의 배낭 여행객들이 재희네 집에서 한국을 몸으로 느끼고 돌아갔다.
하지만 한번도 숙박비를 받은 적은 없다. “홈스테이 덕에 우리 식구 모두 너무 신나고 즐거운데 어떻게 돈까지 받느냐”는 생각에서다.
“‘사춘기 딸이 둘이나 있는 집안에 낯선 남자를 그것도 외국인을 들여도 되겠느냐’고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도 많다”고 어머니 김씨는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두 딸 모두 ‘한국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히려 예의를 더 갖추고 성격도 밝고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영어에 일어, 불어까지 두 딸은 굳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외국어 공부에 누구보다 열심이기도 하다.
“외국인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 보세요. 외국인들도 같은 땅 위에 발 붙이고 사는, 우리랑 똑 같은 사람이더라구요” 라고 재희네 식구는 입을 모았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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