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의 미국 경제는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건전하고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다.”1997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캐나다 덴버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다른 선진국 정상들에게 피력한 미국 경제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불과 5년이 지난 요즘 ‘주식회사 미국’은 좌초 위기에 직면해 있다. 뉴욕 증시에서 다우지수가 1만선에 이어 9,000선까지 허망하게 붕괴되자 CNN방송은 다급한 목소리로 “미국호(號)에서 몸을 던진 투자자들이 해변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쳐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단순히 주가와 달러 급락이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자처했던 미국 경제의 ‘건전하고 강한’ 시스템 자체가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 것이 진정한 위기다.
◈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미국 금융시장은 폭풍의 중심권에 들어와 있다. 뉴욕 주식시장은 언제 어떻게 꺼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고,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하던 강한 달러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26일 뉴욕시장에서 다우존스 지수는 연일 폭락세를 거듭한 끝에 장중 9,000선이 붕괴됐고 나스닥지수는 9ㆍ11 테러 이후 최저점 밑으로 떨어졌다.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도 장중 유로당 99.42센트에 거래돼 2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세계 주요 통화들에 대해서도 급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 사면초가에 갇혔다
미국 금융시장의 동요는 실물경기 회복에 대한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됐다. 기업들의 2분기 실적 악화에 이은 소비자 체감지수 급감 소식은 경기회복을 믿던 투자자들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반도체 업종이 반독점 조사에 휘말린 것도 투자심리를 위축시켰다. 여기에 중동사태 등 국제적 불안 요인에 7ㆍ4 독립기념일을 즈음한 추가 테러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투자자들은 비관론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국 금융시장의 약세는 경제 주체들의 부를 감소시켜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상수지 및 재정수지의 쌍둥이적자는 미국 경제의 가장 큰 딜레마가 되고 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지난해 4ㆍ4분기 951억 달러에 이어 올 1ㆍ4분기에 1,125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증가 추세가 기하급수적이다.
또 재정규모도 부시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정책과 대 테러전쟁으로 인한 군사비 급증 등으로 5년 만에 첫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우려된다.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려면 달러의 완만한 하락을 용인하는 한편 외국인 자본 유입을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못하다. 달러 하락은 과속 단계에 접어들었고 경기회복을 위해 금리인상을 결정할 처지도 못된다.
◈ 위기의 본질은 기업의 신용위기
미국은 전세계 자금이 가장 안전하게 돈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투자처로 인식된다. 막강한 경제력에 투명하고 공정한 기업회계 및 금융감독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잇달아 터져나온 기업과 회계법인들의 무더기 회계 비리와 금융기관의 부도덕한 행태는 이같은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22일자)에서 1997년 이후 1,000개 가까운 미국 기업이 순익과 현금 흐름 등 경영활동을 부풀리기 위해 회계 장부에 손을 댔다가 다시 수치를 정정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최근 기업의 각종 비리와 관련, 최고경영자(CEO) 40여명이 당국의 소환을 받았거나 사임하는 홍역을 치르고 있다.
기업은 엉터리 회계 장부로 투자자를 기만하고, 이를 감시해야 할 회계법인과 증권사 등은 오히려 기업편에 서서 이익을 나눠 먹기에 혈안이 돼 있는 추악한 미국 경제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파이낸션타임스는 최근 자본주의 스탠더드를 자처했던 ‘주식회사 미국’이 각 분야에 만연된 모럴 해저드(도적적 해이)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돈의 논리는 냉혹하다. 9ㆍ11 테러 직후인 지난해 4ㆍ4분기에도 월 평균 577억 달러에 달했던 국제자금의 미국 유입액은 올들어 154억 달러 수준으로 급락했다.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 추락으로 미국 자산에 대한 매도가 본격화하면서 미국 금융시장은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경기반전 열쇠는
미국 증시의 폭락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복잡하다. 미국 경기가 하강하고 있으며 불안요인이 상존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현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호르스트 쾰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27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산하 공개시장위원회(FOMC)가 1.75%의 현 금리를 유지키로 결정한 것을 거론하며 올해 미국 경기가 3~3.5%에 달하는 견실한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문가들도 금리가 유지됨으로써 저리 할부금융에 자극받아 주택 및 자동차 매입 등 소비심리가 살아날 것으로 기대했다.
메릴 린치의 제럴드 코언 분석가는 “금융시장에 어두운 뉴스가 많으나 경제기조는 탄탄하다” 며 “자본투자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 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달러 약세에 따른 유로 강세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유럽경제의 성장세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유로 강세는 수출력 약화로 이어져 경제회복을 더욱 지연시킬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일부에서는 유로화 강세가 인플레 압력을 막고 있는 만큼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를 유지하거나 인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월가와 기업의 신뢰성 위기가 이번 증시폭락의 결정적 악재였던 만큼 경기지표와 관계없이 투자자들의 경색된 심리를 얼마나 조기에 회복시킬 수 있느냐가 경기반전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유석기자
■CEO, 동네북 신세 추락
’날개없는 추락.’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요즘 위상을 대변하는 말이다.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제왕적 권한을 누리며 신의 존재로까지 추앙받던 이들이 몰락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이들이 벌인,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기업 사기행각이 잇달아 폭로되면서부터다.
인력시장에는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당국의 조사를 받는 전직 CEO 실업자로 때아닌 고급인력 풍년을 맞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고 있다.
“미국은 곧 기업”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던 CEO들의 과거 영광을 생각하면 최근 이들에 대한 비난의 어조는 상전벽해를 연상시킨다.
미국 경기가 호황을 맞던 10여년 전만 해도 이들은 천문학적인 보수는 물론, 미국 대통령까지 본받아야 할 모델로 거론할 만큼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CEO가 기업수익에 대해 제때 보고하지 않아도 이사회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이사회 회의에 이들이 참석하는 자체를 영광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가 됐다. 이사회 회의에 이들을 불러 노골적으로 조롱하거나 호통을 치는 일은 보통이고 연봉삭감, 사임을 강요하는 일도 다반사처럼 됐다.
회계조작 혐의로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를 받고 있는 통신업체 ‘퀘스트 커뮤니케이션’ 은 최근 이사회를 열어 CEO 조지프 나치오를 회사에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부채를 남겼다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잭 웰치 후임으로 제너럴 일렉트릭(GE)의 CEO가 된 제프리 이멜트는 대주주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웰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업정보를 이사회에 보고해야 했다.
이들이 기업비리의 원흉으로 전락한 데는 1980년대 말 투자자들이 만든 CEO 개혁안이 자충수로 작용했다.
당시 투자자들은 기업 주가에 관계없이 CEO가 엄청난 보수를 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이들의 연봉을 주주들의 이익과 연계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스톡옵션은 기업가치와 연봉을 한데 묶기 위한 이 같은 조치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역풍을 맞았다.
연봉의 열쇠를 쥐고 있는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CEO들의 분식회계, 기업수익 허위발표 사례가 줄을 이었다.
월가의 한 투자분석가는 “CEO들이 주가를 올림으로써 보수를 더 받는 상황에서는 기업의 대차대조표는 돼지저금통과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컨퍼런스 보드, 뉴욕증권거래소 등 민관 금융당국은 최근 CEO들의 막대한 권한과 이익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를 연구중이다.
이들의 스톡옵션을 줄이고 이들과 주주간 관계를 보다 투명하게 하는 게 그 중 하나이다. 정부에서는 기업경영 전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올해말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일부의 사례로 모든 CEO들을 속죄양으로 만들려 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 데다 자칫 이들의 자율성 창의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 CEO 처리문제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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