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48년간 월드컵 1승도 이루지 못했던 한국축구가 2002 한일월드컵서 4강 진출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태극전사들의 투지와 대한축구협회의 과감한 투자도 있었지만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이 큰 몫을 했다.히딩크라는 유능한 ‘고액 과외교사’의 18개월에 걸친 ‘족집게 과외’가 없었더라면 4강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히딩크가 떠나간 이후 한국축구는 4강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더 이상 ‘고액과외’에 의존한 벼락치기로 반짝 성적을 올리는 것이 아닌 진짜 실력을 키워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됐다.
전문가들은 ‘한국축구 100년 대계’를 위한 구체적 방법론으로 유소년 축구의 저변확대, 프로축구 활성화, 지도자 육성 등을 꼽았다.
▼프로축구 활성화
한국축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일단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문제는 모처럼 불어온 축구열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바람몰이를 누군가가 해줘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프로축구 K리그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내 프로축구 관계자들은 “한국축구는 지금 오히려 위기를 맞았다”며 걱정한다.
프로축구 수원삼성의 김호(金浩) 감독은 “월드컵서 세계적인 스타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즐기며 눈 높이가 올라간 데다 관심을 모았던 국내 선수들마저 해외로 빠져나갈 경우 오히려 외면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 결국 프로구단 스스로 수준 높은 플레이를 선보이고 서포터스를 육성하는 등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
김광명(金光明) 축구협회 기술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은 “일부 구단의 경우 승부에만 연연해 경기 내용이 보잘 것 없었던 점도 사실”이라고 꼬집고 “월드컵을 계기로 대혁신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소년 축구의 저변확대
축구의 인프라나 다름없는 유소년축구의 저변이 확대되지 않고서는 2002년 6월의 영광은 반짝 신화로 끝나고 말 것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어린이 축구교실은 30여개 안팎. 축구 강호인 유럽에만 100만개가 넘는 유소년클럽이 활동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울산 현대의 김정남(金正男) 감독은 “유럽에선 유소년클럽을 거쳐 수많은 선수와 축구팬들이 나온다. 프로구단 중심으로 유소년클럽을 결성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광래(趙廣來) 안양 LG감독은 “우리나라의 경우 학교체육 중심으로 운영되는 현실상 당장 유소년클럽 결성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10개 구단별로 초ㆍ중ㆍ고 20여개팀을 전담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단기대회를 몇 차례하는 것보다는 유소년클럽이나 초ㆍ중ㆍ고 선수들이 참여하는 리그제를 도입해 어린 선수들이 최소한 1주일에 한번은 경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계적인 지도자 육성
국내 초ㆍ중ㆍ고 축구팀마다 히딩크가 실시했던 ‘셔틀런(왕복달리기)’을 훈련에 포함시키는 것이 열풍처럼 번져가고 있다.
하지만 김인배(金仁培) 중고축구연맹 경기이사는 “선수에게 필요한 체력은 마라톤 같은 지구력이 아니다. 진짜 체력은 경기 중에 발생하는 상황에 맞게 길러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국내 유소년축구에는 통일된 교본조차 없다. 체계적인 훈련은 고사하고 지도자 개인 특성에 따라 훈련방법도 천차만별이다. 김희태(金喜泰) 명지대 감독은 “감독과 코치 등 지도자를 육성활 수 있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히딩크와 같은 명장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누가 차기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든 소신을 갖고 대표팀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이왕구기자
fab4@hk.co.kr
■가디언紙 '히딩크이후 한국축구' 칼럼
영국 가디언지는 26일 한국 축구의 앞날에 대한 칼럼을 게재했다. ‘히딩크 이후 한국 축구의 험난한 길’이라는 이 칼럼은 한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얻은 자신감이 곧 사그러들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한국 축구를 살려나가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편집자주
한국인들은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제주도 별장을 제공하고 그를 찬양하는 동상을 곳곳에 세우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한국과의 계약이 끝나면 이 네덜란드인은 그의 동상을 닦기 위해서나 가끔 한국에 들를 것이다.
그러면 한국인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국 축구의 성공과 영광이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지는가를 초조하게 지켜볼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29일 터키와의 3, 4위전 이후 한국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그가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한국 선수들은 2006 독일 월드컵서 더 나은 기량을 선보이길 바라겠지만 히딩크 감독의 빈 자리를 채우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축구는 열정적이고 재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유럽의 축구 강국들에게 열등감을 느껴 온 한국에게 이번 월드컵에서 획득한 자신감은 큰 의미를 가진다.
그 동안 월드컵에서 14경기나 치르면서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던 한국이 앞으로 이번과 비슷한 성적을 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16강에 오르는 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다.
한국의 플레이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일방적인 응원, 심판 판정 등 다소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개입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한국은 히딩크라는 최고의 감독을 만났다. 앞으로 한국 축구사에서 히딩크만큼 위대한 감독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지난 23일 동안 한국 축구가 이뤄낸 위업을 계승할 방법이 있다. 첫째, 히딩크 감독을 대신할 훌륭한 감독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둘째 한국 프로축구리그인 K리그를 부흥시켜야 하며 마지막으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개선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유럽 감독을 초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히딩크 감독은 훈련 방법과 기술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위계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한국 축구를 개혁했다.
과거 한국인 감독들은 축구협회 고문위원 등의 간섭에 심하게 시달렸다. 또한 한국 문화의 특성상 대표 선수 선발에 있어서 패기와 능력보다 나이와 지명도가 우선 기준으로 작용했다.
또다시 한국인이 감독직을 맡을 경우 히딩크 감독이 이뤄낸 대표팀의 자립 등 긍정적인 요소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마땅한 최고 수준의 유럽 감독을 찾기도 만만치 않다. 다음 월드컵까지는 아직 4년이나 남았고 그 전에 대표팀 감독으로서 매력을 느낄 만한 큰 대회가 없어 한국으로 오고 싶어하는 감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수백만 명의 한국인이 축구에 완전히 매료됐지만 이 열정을 지속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축구라는 종목 자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월드컵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또한 1년 내내 관중이 1만 명도 채 안되는 K리그의 인기가 갑자기 치솟을 리도 없다.
이번 월드컵이 배출한 스타 플레이어들을 보기 위해 관중이 모여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곧 해외 명문 리그로 진출할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것은 한국 대표팀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K리그의 경기 수준과 인기는 더욱 떨어질 것이고 결국 다음 대표팀을 이끌어 갈 선수 육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한국 대표팀 선수 중 12명은 26세 이하다. 그들은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며 한국축구협회도 선수 육성 프로그램의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저력을 갖춘 한국 축구가 쉽게 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월드컵 때도 4강에서 독일과 다시 한번 맞붙을 수 있을까? 그것도 개최국인 독일에서 말이다. 히딩크 감독은 이것에 대해 제주도 별장을 내기로 거는 일 등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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