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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5)시인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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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15)시인 김지하

입력
2002.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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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우선 3년 전에 쓴 한 편의 시, ‘詩(시)’라는 제목의 시로부터 그 대답을 시도해 보자.

짓지도

쓰지도 말라

이제

속에서 떨리고

밖에서 흐르라

넋이

넋이 아니거든

쓰지 말라

때로

창녀와의 풋사랑이

흰 그늘

빛나는 한 편의

詩.

쉽게 말하자. 궁상도 청승도 허풍도 다 접고 한 마디로 말하자. 넋이 내 시의 기점(起點)이다. 넋이 무엇인가?

넋은 사람이 죽었을 때 ‘날아오르는’ 혼(魂)이요 ‘흩어지는’ 백(魄)이다. 넋은 사람이 살았을 때, 안에서 ‘떨리는’ 영(靈)이요 밖에서 ‘흐르는’ 생명(生命)이다.

혼 없이 백 없고 백 없이 혼 없듯이, 영 없이 생명 없고 생명 없이 영은 없다. 영이 커질수록 생명은 복잡해지고, 생명의 복잡성이 촘촘해질수록 영의 깊이 또한 깊어진다.

영이 안에서 ‘떨리고’ 생명이 밖에서 ‘흐르는’ 것을 일러 풍류(風流)라 한다.

‘떨리고 흐르는 넋’을 두고 ‘풍류도(風流道)’라 한다.

“넋은 곧 도(道)인가?”

그렇다.

“도는 바로 넋인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넋의 풍류 탓이다.

그 뿐.

2.“너의 시는 억압, 투쟁, 고통, 외침, 저항, 혁명, 고문, 죽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모두 넋의 시란 말인가?”

그렇다.

“왜?”

그 극한적인 것들에 대한 내 넋의 떨리는 감응과 흐르는 반응이 곧 나의 시였다.

“예를 들어라!”

거의 모두 다 떨림과 흐름이 없을 때, 즉 나의 넋이 넋이 아닐 때 나는 짓지도 쓰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태작을 썼다. 그러매 30년 시업(詩業)이 거의 적막하기까지 하다.

“그 기념비(記念碑)는 무엇인가?”

아마도 ‘황톳길’이나 ‘불귀(不歸)’나 ‘어름’이 아닐까?

“그것은 아주 옛날인데 3년 전에 그 시론(詩論)을 반복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왜?”

내 넋이 새로운 도전에 부딪쳐 전처럼 결연하지 못하고 방만했기 때문이다.

“너의 시를 정치적 선동 선전시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럼 3년 전 앞뒤의 새로운 도전이란 무엇인가?”

3.‘애린’이다.

그러나 나는 ‘애린’의 도전을 역시 내 넋의 떨림과 흐름으로 결연히 응전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창녀(娼女)와의 풋사랑이다.

애린은 창녀다.

창녀는 천민(賤民)이다.

인간과 신(神)이 합일(合一)하는 순간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직업으로 하기 때문에 가장 참혹하게 저주받은 인간이다. 그러매 창녀와의 풋사랑은 고통에 찬 기적이다. ‘모순 어법’이다.

“그것이 너의 새로운 문학이요 문학의 동기인가?”

그렇다.

“미학 또는 시학으로 그 말을 바꿀 수 있는가?”

있다. ‘흰 그늘’이다. ‘그늘’은 삶의 신산고초요 생명의 복잡성이다. ‘흰 빛’은 초월적 ‘아우라’요 신령함이다. ‘흰 그늘’이란 ‘신비의 과학’이나 ‘은총의 중력(重力)’처럼 ‘모순 어법’이다.

“그것은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인가?”

그렇다. ‘그늘’은 우선 우리 민족 전통예술 일반에 적용되는 민족 미학의 제1원리다. 그것은 윤리적이면서 미적인 패러다임이요, 전통적이면서 초현대적 패러다임이며 슬픔과 기쁨, 골계(滑稽)와 비장(悲壯), 이승과 저승 그리고 영성적이면서 생태학적인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은 일단은 미학적 계율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그 안으로부터 새하얀 ‘아우라’, 동양적 표현으로는 신성한 ‘무늬’가 생성 계시될 때까지는.

4.“너의 등단 배경을 말할 필요가 있다.”

시인이기 이전에 나의 꿈은, 아직 확실치는 않았으나 일종의 ‘사드비프라’(인도 사상가 사르카르의 ‘행복한 길 운동’에서 주체로 설정된 영적 혁명가) 혹은 일종의 ‘요기-싸르’(내면적으로는 수행자이자 외면적으로는 혁명가인 사람)이었다.

명상과 변혁의 통일자, 혹은 ‘영적 혁명가’ 혹은, ‘삼ㆍ일신고(三ㆍ一神誥ㆍ단군이 겨레 지도자들에게 전한 가르침)식으로 말하자면 ‘성통공완’(性通功完ㆍ성품을 도통하고 세상을 바꾸는 공을 이룸)의, ‘신선혁명가(神仙革命家)’를 꿈꾸었고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맸다.

동학(東學)에서 이것은 ‘시인(侍人)’ 즉 ‘모시는 사람’이니 ‘안으로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는 사람’이라 칭한다. 안의 신령과 밖의 기화란 다름아닌 영의 떨림과 생명의 흐름이다.

어쩌다 시인이 되었다. 시와 행동(行動)이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 길흉(吉凶)을 점(占)치는 소발굽 같기도 하고 하나가 됐다 둘이 됐다 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설화 같기도 했다.

등단 전에 내 주변엔 ‘폰트라’(PONTRAㆍPOEM ON TRASH, 쓰레기 위에 시를!)라는 사귐이 있었다. 여기서 어느날 한 여자 선배 왈, ‘네가 결혼하거나 연애를 하려면 반드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니 시인으로 문단에 등록해라’고 자꾸만 권유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등단했다.

그런데 그 뒤의 나의 시가 과연 ‘폰트라’의 길을 갔던가?

5.거듭된 저항과 투옥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피로감을 술로 풀다 풀다가 나는 지치고 병들었다. 내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갔다.

혹독한 ‘죽임’의 예감으로 나의 시는 일종의 ‘묵시’가 되기도 했으나 그 극단적인 시적 ‘반혼(返魂)’ 속에서 도리어 넋의 무거운 만가(輓歌)로, 영적 파탄으로까지 변해 갔다. 그 반환점이 곧 ‘애린’의 출현이다.

그러나 애린은 ‘흰 그늘’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제 내 앞에, 밑에, 틈에, 그리고 내 뒤에서까지 ‘흰 그늘’을 부름으로써 진정한 넋의 떨림과 흐름, 영과 생명의 풍류로 나아가고자 함이 지금의 내 삶과 내 시의 동기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바로 그것,

넋의 풍류 탓이다.

그 뿐.

6.내가 앓았던 그 오래고 오랜 질병의 한 끝에서 10여년 전에 나는 또 한 편의 시를 얻었다. 그 시 ‘속’으로부터 대답의 마지막을 갈무리해 보자.

솔직한 것이 좋다만

그저 좋은 것만도 아닌 것이

詩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

‘어둠’과 ‘햇살’!

이 때 이미 ‘흰 그늘’은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분열되어 있었다.

확실한 미학적 의식으로 확대되고 심화된 과정은 4ㆍ19 직후인 스무 살 때의 아득한 흰 길의 한 환상, 민청학련 무렵인 서른 세 살 때의 우주에의 흰 길의 한 환상, 재구속되어 옥중에서 100일 참선에 돌입했던 서른 여덟 살 때의 흰 빛과 검은 그늘의 한 투시, 그리고 4년 전 율려 운동을 시작하던 쉰 여덟 살 때의 대낮의 뚜렷한 한 문자 계시를 통해서 왔다. 그리고 3년 전 가야(伽倻) 여행에서 점차 시학적 명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흰 그늘’의 길은 그 자체로서는 아득하다.

지금 내게 있어 그 길은 우선 삶의 길을 뜻한다.

목숨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살아야 비로소 넋이 넋다운 떨림과 흐름의 풍류도로 내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매 시는 내게 있어 일단은 하나의 ‘활인기(活人機)’다.

‘죽임이 가득한 이 세상과 이 넋의 지옥에서 ‘삶’과 ‘사람’과 ‘살림’을 가져올 하나의 ‘활인기’다.

되풀이하지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한 마디로 말하자. ‘살기 위해서’다.

어찌 살려 하는가?

이 길!

나의 시, 나의 삶으로 가는 이 ‘흰 그늘’의 길!

우주 저편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흰 그늘의 길’에 서는 것.

나그네는 반드시 길에서 죽는다던가?

● 약력

▲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 1966년 서울대 미학과 졸업

▲ 1969년 문예지 '시인'에 '황톳길' 등 시 5편 발표 등단

▲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1964) '오적(五賊)'사건(1970) 민청학련 사건(1974) 등으로 8년여 투옥

▲ 1988년 문화운동단체 '율려학회' 발족

▲ 시집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애린' '별밭을 우러르며' '이 가문 날의 비구름' '중심의 괴로움' 등 산문집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옹치격'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보내는 겨울 편지' 대설(大說) '남' 등

▲ 로터스특별상(1975) 위대한시인상(1981) 크라이스키인권상(1981) 이산문학상(1993) 정지용문학상(200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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