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티르 모하마드(76) 말레이시아 총리가 또 한번의 정치적 모험을 결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권력유지를 위해 정적을 탄압하는 독재자의 전형과는 정반대의 방식을 택했다.내년 10월 이슬람회의기구(OIC) 정상회의 후 총리직은 물론, 집권 통일말레이국민기구(UNMO) 총재직, 연정 범여당인 국민전선(BN)의 직책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권력을 넘기겠다는 것이다.
UNMO 최고회의 기간 중인 25일 전격 발표된 이 같은 결정은 독재로 얼룩진 아시아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그의 장기 통치에 길들여 온 말레이시아 정국은 당혹감과 혼란에 사로잡혀 있다.
마하티르 총리가 왜 권력을 갑작스럽게 포기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22일 당대회 연설 도중 총재직 사임을 발표했다 당간부 및 당원들의 만류로 1시간 뒤 사임을 철회하는 해프닝을 연출할 때만 해도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계산된 연기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62) 부총리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권력이양에 따른 정치일정의 윤곽까지 공개하자 21년 간 말레이시아를 통치해 온 아시아 최장기 집권자가 명예롭게 퇴진하는 첫 역사적 사례라는 평가까지 대두되고 있다.
당 간부들과 그의 가족들에 따르면 마하티르 총리가 퇴진을 염두에 둔 것은 이미 오래 전이며 인기가 정점에 있을 때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취미인 목공일과 요트를 즐기면서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퇴임의 배경이다. 이번 결정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요트휴가를 즐기면서 구체화했고, 사임발표 직후 10일 간 다시 나폴리로 휴가를 떠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사임 해프닝을 맹비난했던 야당측도 논평을 자제한 채 사태 추이만 주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깜짝 쇼’가 풍문으로 나돌고 있는 조기 총선을 결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각도 나오고 있다.
마하티르는 1999년 총선에서 토착 말레이계가 야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지지로 돌아서 입지가 약화했으나 9ㆍ11 참사 후 이슬람계를 대변할 온건한 지도자로 세계무대에 받아들여지면서 국내외 입지는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태다.
그가 지도자로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아시아 환란이 극성을 부리던 1998년 가을 외환시장 안정대책을 내놓으면서이다.
통화인 링기트화의 고정환율제 도입, 외환ㆍ주식 거래통제를 골자로 한 그의 해법은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등 서방으로부터 “국제자유시장의 대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단자” 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으나 결국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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