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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축구사에 새긴 붉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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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축구사에 새긴 붉은 혁명

입력
2002.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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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종료 휘슬이 울렸다.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으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상암동 경기장 위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어제까지도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던 불꽃이, 이제 독일 팀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찬란한 불꽃이었다. 누군가의 혼잣말이 들려 왔다. “그래도… 잘 했다.”

이번 월드컵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히딩크 감독과 축구 선수들이, 그리고 전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어 성공시킨 ‘축구사의 붉은 혁명’이었다고 명명하고 싶다.

지난 한달 간은 태극전사가 세계 축구사와 지형을 갈아엎은 혁명기였고, 국민 의식의 대전환기였으며, 붉은 패션의 승리기였다.

선수들은 파죽지세로 연승가도를 달렸고, 그 아름다운 가도마다 붉은 응원단이 동행했다.

예전 중국 홍위병들이 대자보를 바라보았듯이, 붉은 옷의 700만 우리 국민은 거리 광장에 운집하여 전광판을 보며 열광했다. 누군가 이를 ‘샤머니즘’이라고도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샤머니즘의 붉은 색 주술에 걸린 듯 경기장과 광장으로 달려가 응원했고 승리했다. 그리고 열광했다.

딜런 토머스의 시처럼 ‘이렇게 좋은 밤에 점잔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 정치학자가 붉은 인파를 어리석은 대중이라 부를 수 있는가.

역사는 다른 박자로 북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목한다. 다른 문화권의 축구팀은 절묘한 ‘대~한민국’ 외침과 경이로운 엇박자의 박수를 조심해야 했었다.

‘아리랑’ 합창이 우렁찼고, 가까워질 것 같지 않던 태극기도 새롭게 디자인되어 우리의 얼굴과 팔,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기억의 창고에 있던 우리 문화가 싱그런 생명력으로 소생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응원장의 아줌마ㆍ아저씨도, 먼 이국의 동포도 한 목소리로 외친다.

참 오랜만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애국심과 민족적 긍지를 맛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땀의 결과이며 그 앞에서는 두려울 게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축구는 국가나 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 잡는 최상의 수단일 것이다. 축구는 또 가난한 소년들의 꿈을 배반하지 않는다.

브라질의 한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 프로 축구 선수의 3분의 2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 중 절반은 인종차별?받는 흑인이거나 물라토다.

고교 때까지 변변한 축구화를 신어 본 적이 없던 선수, 한 때 궁핍을 견딜 수 없어 집을 뛰쳐나가 술집 웨이터도 했던 우리 선수들이 모두 당당한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 축구에는 혁명적 낭만이 있다.

29일 3ㆍ4위 결정전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덧 월드컵도 대미로 접어들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온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황선홍 선수가 피를 흘리며 분투했고, 안정환이 기막힌 헤딩슛을 성공시켰고, 박지성과 설기현이 그림 같은 슛을 날리던 명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입던 붉은 옷과 제스쳐가 멋지던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 엄청난 인파와 함께 지금도 환청(幻聽)처럼 들려오는 듯한 “대~한민국”의 연호….

월드컵은 끝나도 훌륭한 경기장은 남는다. 그 축구장에서 어린 선수들을 정성껏 키워서 월드컵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자. 축구에 더 많은 열정과 지원을 쏟아 4강의 명예를 지켜 가자.

그런 의미에서 이번은 미완의 축구 혁명이기도 하다. 4강전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카드 섹션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지금까지의 월드컵 기억만으로도 행복하고 또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월드컵을 기다릴 것이다. 혹여 월드컵 금단 현상이 오더라도 일시적 딜레마를 불만 없이 받아 들이리라.

우루과이의 한 지식인처럼, 사랑이 끝난 후와 월드컵이 끝난 후 모두가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울적함과 고독을 깊이 간직할 것이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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