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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3)집 없는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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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3)집 없는 설움

입력
2002.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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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벌써 투병 8개월째다. 지칠 줄 모르고 쉬는 날도 없이 나를 보살피는 것은 역시 마누라밖에 없다. 만약 딸이었다면 진짜 짜증을 안 냈을까. 하물며 남은 오죽할까.오늘은 셋방살이를 수십 차례 전전해야 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처음 서울에 살기 시작한 것은 1964년 서울 청량리였다.

군 제대 후 그곳 무허가 하숙집에 머물며 충무로 스카라극장 주변을 배회했던 것이다. 물론 군예대 시절 안면을 튼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가짜 약장수가 벌이는 쇼에서 사회를 보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 나는 얼마 안가 제법 유명해졌다. 지방 쇼단에서 출연교섭이 들어오고 서울 변두리 극장무대에도 서게 됐다.

2, 3년 후 춘천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상계동 판자촌으로 불렀다. 아들 하나만 있을 때는 그래도 집구하기가 편했는데 딸이 2명이나 더 생기니 상황이 달라졌다.

애들이 많다고, 애들 나이가 어리다고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나 “나이가 어리니까 애들이지, 많으면 어른이게?”라고 쏘아붙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허름한 전셋집 한 칸을 얻었지만 이번에는 집주인의 괄시가 시작됐다. 큰 아들 창원(昌元)이가 안집 아이를 때리면 창원이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맞아야 했다.

나에게 맞고, 아내에게 맞고, 안집 할머니에게 맞고…. 집 사람은 애들을 때려놓고 밤새 울곤 했다.

전기 많이 쓴다고, 빨래 하다 수돗물 많이 쓴다고 괄시 받을 때가 가장 서러웠다. 이런 생활을 상계동에서만 10번 넘게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며 겪어야 했다.

그러다 74년 금호동 산동네로 이사를 갔다. 좀더 충무로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세든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방 2칸짜리 집이었는데 안방에는 집주인이, 건넌방에는 우리가 살았다.

가수 하춘화(河春花)의 아버지 하종오(河宗五)옹의 도움으로 그 집을 통째로 사게 된 것은 그로부터 4, 5년 후의 일이다.

하옹이 쇼단에서 받는 내 월급을 꼬박꼬박 챙겼다가 아내에게 돈을 부쳐줬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기뻤다. 아내는 “이제 꿈이 이뤄졌다”고 말하며 즐거워했고, 그날 밤 시루떡을 가져와 이웃에게 돌리기까지 했다.

“무슨 새 집이 생겼다고 호들갑을 떠느냐?”며 야단을 친 나였지만 셋방살이를 면했다는 기쁨은 마찬가지였다.

건넌방에 세를 놓기로 한 다음날 아내는 의기양양하게 대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애 있는 집, 절대 세 안 줌’.

이 금호동 집은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복덩이 같은 집이었다. 비록 판잣집 수준이었지만 그 집을 사고 1년 후에 내가 유명해졌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등교 길에 나를 보고 “사인해주세요”라고 말하며 달려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후 도곡동과 압구정동을 거쳐 지금의 분당까지 여러 차례 집을 옮겼지만 금호동 그 집만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중병에 걸린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잠시 잊고 산 것에 대한 벌 같다.

셋방을 전전하며 150원짜리 자장면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그 시절을 유명해지고 나서 깜빡 잊은 것이 잘못이었다.

집주인 눈치 보느라 제대로 켜지도 못했던 전등불이 방송사의 화려한 조명으로 바뀌었을 때에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사과궤짝을 화장대로 사용하면서도 행복했던 그 과거를 기억해야 했다. 금호동 그 집에서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은 생각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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