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열기 속에 묻혀 버린 아주 위험한 사건이 있었다. 에이즈에 감염된 여성이 지난 수년간 전남 여수 등지의 사창가에서 많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가졌다가 적발된 것이다. 또 진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그 후 여수에서는 24일까지 에이즈 감염 여부를 1,350건이나 검사했고 아직도 검사는 계속되고 있다. 또 에이즈 관련 단체의 상담실에는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상담이 들어오고, 인터넷 게시판을 조회하는 회수도 부쩍 늘었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상담 게시판은 클릭수가 하루 5,000회를 넘어서고 있다. 불안에 떠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다. 남들은 흥겹게 월드컵 승리에 들떠 있을 때 일부 국민은 남모르게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에이즈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개인과 사회, 정부가 각각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만 처리한다면 에이즈는 이길 수 있다. 에이즈는 무서운 병이 아니다.
우선 개인이 노력만 하면 막을 수 있다. 이미 전 세계에서 6,200여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했거나 감염되었지만 첫 발병 이후 21년이 흐르면서 에이즈는 다른 질병보다 확실히 예방이 가능한 질병으로 판명이 났다. 그러니 감염경로를 막는 것은 개인과 사회, 국가의 몫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에이즈 환자의 97%가 성접촉으로 감염된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과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접촉 상대가 감염되었는지 조차 모르기 일쑤다.
국가는 전체 국민의 건강 보호를 위해 예산을 늘여 감염된 사람과 감염되지 않는 사람을 가려 내야 한다. 그리고 감염자에 대한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여수 사건은 감염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개인의 대비가 부족해 생긴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감염 여성은 남성 고객들이 에이즈 감염을 막을 수 있는 콘돔사용을 거부했다고 했다.
다음으로 스스로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빨리 검사를 받아야 한다. 에이즈는 이제 불치병이 아니라 당뇨병 같은 성질환이다. 감염되었더라도 관리를 철저히 하면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에이즈 퇴치에서 정부가 할 수 있에는 한계가 있다. 일단 감염된 환자를 철저히 관리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감염자의 성생활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성생활까지 개입할 수는 없다.
한집에 사는 가족끼리도 막을 수 없는데, 보건소 직원이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안전하지 못한 관계를 가질 경우 콘돔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엔 아직도 여수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에이즈 감염자들이 서로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을 해주는 ‘감염자 상담센터’다. 이들은 동료 환자의 간병이나 도우미 역할을 맡고 일부는 에이즈 예방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국민의 건강을 위해 호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연결만 된다면 여수사건 같은 일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부관리의 사각지대를 감염자 스스로 감시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수 사건을 계기로 에이즈 감염자들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상담센터에 들어오면 절망에서 벗어나 건강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정부와 민간기관에서도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각종 지원책을 서둘러 마련하고 있는 만큼 당사자의 의지만 확실하면 자신도 살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사회 전체가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에이즈를 이겨낼 수 있다.
이제 우리도 ‘에이즈를 몰아내는 시대’가 아닌 ‘에이즈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됐다. 감염자에 대한 차별이나 사회적 낙인 없이 서로 도우며 사회적 책임을 느낄 때 예방이 가능하고 에이즈도 이길 수 있다.
/권관우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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