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炎帝) 신농(神農)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황제(黃帝)에게 도전장을 냈던 치우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장렬히 죽고 말았다. 그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장자’(莊子)에서는 탁록의 들녘에 피가 백리를 두고 흘러내렸다고 표현하였다.황제는 패배한 치우에게 온갖 죄악을 덮어 씌웠다. 그는 탐욕과 오만, 잔인함과 무도함의 화신이 되었다. 반대로 황제가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요, 자비와 인정을 베푸는 선신(善神)으로 칭송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치우는 호락호락 죽어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강인한 신이었다. 그래서 몸은 비록 죽었어도 기운은 살아 있어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으로 살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그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았을 때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꽉 채웠다. 그리고 치우의 목을 자르고 난 후 피묻은 수갑과 족쇄를 풀어 내버렸는데 그것들이 나무로 변해버렸다.
그 나무의 잎새는 피빛처럼 붉어서 치우의 처참한 죽음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풍나무는 이렇게 치우의 넋이 깃들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신체의 변형(Metamorphoses)이 흔히 일어난다. 고대인들은 몸이 스러져도 바탕의 생명력이나 영혼은 죽지 않고 다시 몸을 바꾸어 되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변형 이야기가 많다.
가령 아폴론이 에로스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고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된 요정 다프네는 아폴론에게 쫓기다 못해 월계수로 변해버린다. 치우가 처형당한 땅에서도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치우의 목이 잘린 지역은 몸이 분해되었다고 해서 해현(解縣)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현에 있는 해지(解池)라는 호수는 물 빛깔이 붉다. 그것은 치우가 목이 잘릴 때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한다.
치우의 잘린 목과 몸체는 그의 본거지였던 산둥 땅의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鉅野縣) 두 지역에 따로 묻혔다. 머리가 매장된 수장현의 주민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 용맹한 신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무덤으로부터 피어올라 하늘까지 치솟아 마치 깃발이 너울거리는 것 같아 그것을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 한다.
이 붉은 안개같은 기운은 붉은 단풍, 붉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의 변형된 모습이지만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죽어서도 굴복하지 않는 치우의 기개와 투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치우는 고향인 산둥에서 병주(兵主)로 숭배된다. 병주는 곧 군대와 전쟁의 신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훌륭한 무인이나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을 때 신으로 숭배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는 일찍이 치우가 있었고 삼국시대 이후에는 그것이 관우(關羽)로 바뀐다.
오(吳) 나라 장군 여몽(呂蒙)에게 비명횡사한 관우가 후일 민간에서 군대의 신, 재물의 신으로 숭배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최영(崔瑩), 임경업(林慶業) 등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최영 장군은 고려의 충신이었으나 이성계 일파에게 제거당한 후 무속의 큰 신으로 거듭 태어나고 임경업 장군 역시 충신이었으나 간신 김자점(金自點) 등의 모함에 의해 옥사(獄死)하자 그가 한때 머물렀던 연평도의 해신(海神)으로 섬겨진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고대 동아시아의 원시종교인 샤마니즘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한(恨)이 깊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치우 일족이 패망한 이후 더 이상 황제계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신농의 자손은 중국 도처에 있어서 치우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선 그 중의 하나인 형천(刑天)이라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형천은 본래 신농의 신하로서 음악을 담당하던 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신농에게 무척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끓는 피의 기질을 지녔던 신이었던 듯 하다. 치우가 실패하자 그는 다시 흩어진 신족(神族)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잘 쓰는 무기인 도끼를 휘두르며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황제 역시 응수하여 두 신은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 교봉한지 얼마 안되어 황제의 칼이 번득이더니 형천의 목이 날아갔다. 형천 역시 황제의 적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는 형천의 목을 곧 땅에다 묻었다. 목이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목이 잘린 형천은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형천의 젖가슴이 눈으로 변하고 배꼽이 입으로 변하더니 그는 도끼와 방패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형천은 비록 목이 잘렸어도 황제에 대한 증오와 투쟁의 의지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서 마침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음악의 신답게 그는 투지를 리드미칼한 춤으로 표출하였다. 형천의 이러한 형상은 반항아의 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머리 없는 몸의 도끼 춤, 그의 이 무망(無望)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한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그것을 승화시키려는 몸부림이 느껴지기도 한다.
황제는 결국 치우와 형천 등 크고 작은 반란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신계(神界)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후 황제의 치세 동안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중앙의 신의 지위를 잠시 증손자인 전욱에게 물려주고 쉬고 있을 때 큰 사건이 발생한다. 신농의 후손인 공공(共工)이 치우와 형천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공공은 본래 수신(水神)으로 서북방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다가 전욱이 무리한 정사를 펼칠 뿐 아니라 과거 신농 계통의 신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고 최고신에 도전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마침내 공공은 아홉 개의 사람 머리를 지닌 구렁이인 신하 상류(相柳)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전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욱은 비록 폭정은 했지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로부터 물려받은 강한 군사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전욱군과 공공군은 맞붙었고 공공군이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점차 패색이 짙어지자 성미 급한 공공은 초조해졌다. 그는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으로 하늘을 지탱하고 있던 큰 산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쿵’하는 굉음과 함께 기둥 노릇하던 산의 허리가 꺾어져서 천하의 서북쪽이 올라가고 동남쪽이 내려앉아 버렸다. 이 때부터 이 산은 온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부주산(不周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주산의 허리가 꺾어짐으로 인해 세계는 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즉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지형을 보면 모든 강들이 지대가 높은 서북 지방에서 흘러나와 동남쪽으로 향해 흘러간다.
우리나라의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이른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과는 정반대의 지리적 현상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공의 전쟁 신화는 겉으로는 신들의 다툼이지만 속으로는 중국의 지형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기원신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황제ㆍ전욱과 치우ㆍ형천ㆍ공공과의 전쟁신화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중국의 신계(神界)를 크게 양분하였던 황제계와 신농계 신들간의 갈등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력의 구조는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이후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질서와 혼돈, 중심과 주변, 문명과 야만의 구분법이었다.
이러한 구분법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이성과 조화의 화신인 아폴론이 헬라인의 문명 세계를 표현한다면 감성과 열정의 화신인 디오니소스는 주변부 소아시아의 거친 세계를 대변한다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성향은 중국에서는 결국 유교와 도교라는 상이한 종교문화를 만들어내고 양자가 길항, 보완하는 관계 속에서 동아시아 문명을 빚어내게 된다.
●각저회
치우의 끊임없는 투혼은 민속에도 반영되었다.고대 중국의 미간에서는 싸움 잘하는 치우의 형상을 본뜬 각저희라는 놀이가 유행하였다.각저희는 쇠뿔을 머리에 꽂은 두 사람이 힘겨루기를 하는,일종의 씨름과 같은 유희였다.고구려 고분 각저총에는 바로 이 각저희가 그려져 있어 고대 한국이의 치우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글=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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