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의 부패청산 프로그램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노 후보의 프로그램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반(反) 부패 정책, 인사정책이 실패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당연히 ‘DJ와의 단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체 내용 및 파장
반(反) 부패, 즉 DJ와의 단절 프로그램이 갖는 선언적 효과 자체가 당 안팎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수 있다. DJ 정부에서 저질러진 권력형 비리, 또 그 비리의 온상 역할을 했던 측근ㆍ실세 정치 등이 단죄의 대상이기 때문에 DJ의 정치적 수혜자들은 수혜 정도와 관계 없이 일단 긴장할 수밖에 없다.
측근 정치와 관련해 청와대 비서실 인사 문제는 폭발력 있는 뇌관이지만 청산 프로그램이 그것까지 타깃으로 할지는 미지수다.
노 후보와 민주당의 청산 프로그램은 과거 청산과 미래 비전 제시를 포괄하고 있다. 다만 과거 청산에는 인적 청산이 포함되기 때문에 민감도는 훨씬 강하다. 당내 정치부패근절대책위(위원장 신기남ㆍ辛基南 의원) 차원에서 이미 공식 거론된 김홍일(金弘一) 의원 탈당 문제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현안이다.
노 후보가 직접 이에 관한 언급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탈당 요구가 철회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와 관련해 24일로 예정된 부패방지대책 간담회 및 부패근절대책위 회의 등에서 김 의원 탈당 문제와 박지원(朴智元) 청와대비서실장 거취 문제가 다시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다.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김방림(金芳林) 의원의 검찰 자진출두도 과거 청산의 내용에 포함돼 있다.
아태재단 해체 및 국가헌납 요구는 김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매우 상징적인 대목이다. 아태재단을 둘러싼 비리에 대한 단죄의 성격도 있지만 퇴임 후 김 대통령 영향력의 배제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DJ와의 단절에 있어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김 대통령 아들 비리에 대한 수사 결과가 미진할 경우, 정쟁화할 국정조사 청문회는 다소 부정적이나 특검제는 수용할 수 있다는 기류가 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노 후보와 민주당이 제시할 미래 비전은 대통령 친인척ㆍ측근 비리 사전감시 및 사후처벌 강화 등 대체로 제도적 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리에 연루된 인사들의 공천배제를 당헌ㆍ당규에 명문화하면 당장 8ㆍ8 재보선 공천에서부터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도 상당히 민감한 대목이다.
■ 노후보-한대표 역할 조정
당초 노 후보는 당에서 부패청산 프로그램의 내용을 채워주고 공론화까지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이번 주 초에 한화갑(韓和甲) 대표의 반(反) 부패 기자회견을 추진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 회의를 거치면서 결국 노 후보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당직개편 등 당내 현안을 매듭지어야 하는 한 대표가 부패청산을 주도하기에는 부담이 있다는 판단에서 역할이 조정된 것이다.
여기에는 김홍일 의원 탈당 문제 등 인적 청산 대목에 대해 한 대표가 다소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부패청산에 대한 노 후보의 주도권을 일관되게 관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했음직하다.
■ 당내반발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가 구상하고 있는 ‘청산 프로그램’에 대해 동교동계와 일부 쇄신파, 중도파 의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신기남(辛基南) 최고위원 등 쇄신파는 ‘DJ와의 절연’의 상징성을 위해 김홍일 의원 탈당을 요구하고 있지만 김 의원은 “탈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화갑 대표도 “개인문제를 그런 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김옥두(金玉斗) 박양수(朴洋洙) 의원 등 동교동계 구파는 물론 설훈(薛勳) 의원 등 신파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김옥두 의원은 “신 연좌제식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쇄신파 그룹 내에서도 이견이 있다. 쇄신연대 간사인 장영달(張永達) 의원은 “자연스럽지 않으며 스스로 발목을 잡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김방림 의원의 검찰 출두 문제에 대해서 김 의원과 친한 의원들은 “쇄신파에 속하는 의원 중 일부도 정치자금 문제가 있으면서 김 의원만 거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청와대 반응
이 같은 단절 프로그램에 대해 청와대 내에서는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기류도 감지되나 섭섭하다는 얘기도 많이 나온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노 후보의 부산ㆍ경남권 중시로 신지역주의를 촉발하는 등 자책점도 있는데 청와대에만 책임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또 김 대통령의 업적까지 훼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반감도 존재한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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