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4번째 키커 호아퀸이 볼을 향해 두세발짝 전진하다 멈칫했다.이운재가 미리 움직이면 반대쪽으로 찰 꼼수였다. 그러나 이운재는 꿈쩍 않고 호아퀸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호아퀸이 맥없이 날린 볼은 이운재의 다이빙에 걸렸다.
한국 축구가 신기원을 열고 이운재(29ㆍ수원삼성)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골키퍼가 재미있냐”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도, “멍든 몸이 안쓰럽다”는 아내의 원망도, ‘만년 2인자’로 밀려 하늘을 원망했던 지난 날들이 이 모두 날아갔다.
이운재는 이번 월드컵서 가장 자부심을 가질만한 선수다. 세계적 골키퍼인 폴란드의 두데크, 포르투갈의 바이아, 이탈리아의 부폰에 이어 스페인의 카시야스까지 제압했다.
22일 한국의 4강 진출은 120분 내내 스페인의 파상공격을 막아낸 이운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청주 청남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공던지기)에서 축구로 바꾼 이운재는 공격수로 활약했으나 청주상고 1학년 때 골키퍼로 변신했다. “힘들고 인기 없는 골키퍼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포지션이었다.
경희대 재학시절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한 뒤 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서 후반에 깜짝 투입돼 45분간 무실점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96년 간염보균자로 드러나 태극마크를 떼야 했다. 소속팀 수원 삼성의 골문은 청주상고 대선배 박철우에게 내 주었다.
2년여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국가대표로 되돌아왔으나 주전 자리는 김병지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를 악물고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계속했다.
92㎏이던 체중이 80㎏(182㎝)으로 줄면서 순발력은 물론 지구력까지 좋아졌다. 덩달아 자신감도 생겼다.
이운재는 ‘승부차기의 보증수표’로 통한다. 1월 북중미 골드컵 멕시코와의 8강전서 승부차기 2개를 막아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98, 99년 국내 프로리그에서 소속팀이 치른 승부차기 승부에선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이겼다. “키커는 실수를 하지만 골키퍼는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게 그의 축구철학이다.
히딩크 감독은 다소 우직스러우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그를 선택, 대업을 이뤘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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