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을 풀고, 동북아의 자유무역을 주도하는 가교가 되자.’내수가 협소한 한국은 14억 인구의 중국ㆍ일본 시장을 빌리지 않고서는 동북아 비즈니스의 중심, 즉 허브(hub)는 불가능하다.
남의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방이 필수적이고, 이 개방화 전략의 키워드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다(give & take)’ 는 정신을 제도화하는 동북아 자유무역협정(FTA) 이다.
싱가포르와 네덜란드가 세계적 허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광활한 배후 지역시장을 자신의 안마당으로 만들어 외자와 외국기업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 동남아 지역본부(헤드쿼터)를 두고 있는 GM은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엔진을 만들고, 필리핀 공장에서 유리를 조달해 태국에서 조립한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동남아 생산과 영업을 총괄한다.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으로 화물을 싣고 온 다국적 기업들은 이곳에서 관세를 내든, 최종 도착국에서 내든 상관 없다. 네덜란드가 유럽의 관문으로 통하는 것은 EU(유럽연합)라는 통합된 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5억 인구의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네덜란드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8%를 차지하는 EU를 세일즈하면서 지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한국의 동북아 허브전략의 출발도 세계 인구의 22%, 세계 GDP의 20%를 차지하는 중국과 일본 시장을 세일즈하는 지역중심이 되는 것.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한ㆍ중ㆍ일 3국의 동북아시아는 EU,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와 함께 세계 3개 교역권으로 부상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한ㆍ중ㆍ일 3개국이 EU와 비슷한 경제블록으로 발전해야 하며, 지정학적 위치나 미묘한 3국 관계를 감안할 때 그 통합의 이니셔티브는 한국이 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동북아 FTA 체결을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FTA는 상품과 자본 이동을 저해하는 장벽을 제거해 상호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 각국이 비교우위 산업에 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NAFTA가 발효된 이후 멕시코의 미국행 수출은 140% 증가했고, 멕시코에 대한 외국인들의 직접투자(FDI)는 4.5배 늘어났다.
멕시코의 국내 시장이 확대되는 효과를 내면서 멕시코를 북미의 생산거점으로 활용하려는 다국적기업 투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의 미국 상품의 점유율도 6%에서 10%로 증가했다.
그러나 WTO 가입국가중 FTA가 없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 둘 뿐이다. 그래도 중국은 지난해 11월 ASEAN과 FTA를 체결한다는 데 합의해 놓은 상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정인교(鄭仁敎) 박사는 “칠레와 같은 소규모 국가, 그것도 지구 정반대편에 있어 계절적으로도 농산물 자유화의 파급효과가 적은 국가와도 3년여동안 협상만 하고 있는 게 한국의 개방화 수준”이라며 “조금이라도 손해가 있는 장사는 안하겠다는 자세를 버리지 않는 한 FTA도, 허브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동북아 FTA체결은 한국의 허브전략이 틈새전략이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다. 싱가포르 경제개발청 세토 록 인 부국장은 “홍콩ㆍ싱가포르는 다국적기업의 부동(不動)의 비즈니스 허브이고, 상하이는 생산ㆍ물류 거점의 위상을 굳히고 있다.
한국이 이 같은 허브모델을 답습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지적했다. 물류ㆍ금융ㆍ비즈니스ㆍ첨단산업 등 모든 부문에서 동북아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은 홍콩ㆍ싱가포르보다 제조업 기반이 두텁고, 중국보다는 숙련된 노동력과 IT(정보기술) 인프라가 풍부하다.
일본은 경제악화와 비용ㆍ언어 때문에 다국적기업이 비켜가고 있다. 결국 홍콩과 중국을 대신해 동북아의 핵심부품ㆍ중간재의 공급 거점과 동북아의 R&D센터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일본을 대신해 중국시장으로 달려오는 다국적기업들에 대해 경영컨설팅, 마케팅, 회계ㆍ법률ㆍ광고 등 비즈니스 지원센터 역할을 해야 한다.
대우인터내셔널 상하이법인 박근태(朴根太) 대표는 “한국의 허브전략은 한국만의 장점을 특화한 틈새전략이 돼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서울-상하이, 서울-도쿄간 항공ㆍ항만 노선을 다국적기업의 셔틀버스로 만들 만큼 벽을 낮추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FTA란
FTA(Free trade agreementㆍ자유무역협정) 말 그대로 관세나 쿼터제 등의 무역장벽을 완전 제거해 한 나라처럼 상품과 자본의 이동을 자유화하는 협약. 상대국에 대해 비교우위에 있는 품목을 수출하고, 열위 품목을 수입하게 돼 상호 이익을 증대할 수 있다.
협정 상대국에 대해서만 이 같은 특혜를 보장하기 때문에 비협정국은 불리한 조건에서 무역을 해야한다.
협약 수준은 다양한데 NAFTA가 역내 관세 철폐를 골자로 하고 있다면, EU는 유럽 경제를 단일 경제로 완전 통합했다.
협찬: 한국원자력 문화재단
유병률기자
bryu@hk.co.kr
■빨라지는 FTA추진 움직임
한국이 허브역할을 꿈꾸는 동북아에도 지역경제의 통합과 단일시장화를 향한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그리고 자유무역협정(FTA)은 시장통합의 가장 중요한 매개체다.
무역자유화 수준을 넘어 화폐통일(유로)까지 달성한 유럽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통해 경제적 통합을 이뤄가고 있는 미주지역에 비하면 동아시아 국가간 경제적 장벽은 아직도 높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한국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ASEAN+3’ 협의체가 가동되고 있지만, 문자 그대로 느슨한 형태의 경제협력 채널에 불과한 상태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동아시아 FTA를 향한 역내 국가들의 발걸음은 아주 빨라졌다. 특히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매듭지은 중국은 지역경제의 새로운 맹주를 꿈꾸며 시장통합에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구상은 FTA를 통해 ASEAN과 대만 등 화교경제권을 한데 묶고, 나아가 한국 일본까지 아우르는 거대 ‘위안블록’을 구축한다는 것.
그 첫 단계로 중국은 지난해 11월 ASEAN과 향후 10년이내에 FTA 체결해 통합시장을 만든다는데 합의했으며, 5월부터 실무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과 아세안이 뭉칠 경우 ▦인구 17억 ▦교역액 1조2,000억달러 ▦총생산(GDP) 2조달러의 초대형 단일시장이 탄생하게 된다.
중국은 이와는 별도로 대만과의 경제적 통합도 모색중이며, 단일 화교경제권을 발판으로 장기적으론 한국 및 일본에 대해서도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저돌적 시장통합정책에 가장 자극을 받은 나라는 일본이다. 지난 30여년간 동아시아 경제의 실질적 리더로 군림해왔던 일본은 FTA와 같은 별도의 시장통합장치 마련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지역경제통합의 주도권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냄에 따라, 일본도 지난해부터 FTA에 적극적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이달말 발표될 ‘2002년 국제무역백서’에서 처음으로 동아시아 주요국가들과 FTA 체결방침을 공식화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FTA 전략이 ASEAN 회원국 전체를 상대로 한 ‘패키지’형이라면, 일본은 각 국별로 별도의 FTA 네트워크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지난해 싱가포르와 FTA의 기본골격에 합의한데 이어, 대만 태국 필리핀 말레이지아 등과도 FTA 체결을 검토중이다. 민간 경제단체 차원이긴하나, 한ㆍ일 FTA도 점차 공론화하는 분위기다.
유럽 미주와는 달리 동아시아의 단일시장화 움직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중국-일본간 주도권 경쟁이다. 현재까지는 ‘뜨는 해’인 중국이 ‘지는 해’인 일본보다 앞서가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FTA를 포함한 지역경제협력 및 통합필요성은 여러 차례 제의했지만, 실질적 진전이 이뤄진 것은 없다.
FTA로 대표되는 지역경제통합 논의에서 소외된다면 한국의 ‘허브구상’도 물거품이 될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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