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와의 연장전 후반, 안정환의 골든골이 터졌을 때 같이 TV를 보던 둘째가 말했다.“엄마 나 소리 좀 질러도 돼?” 아파트 단지 안 아이들의 고함소리속에 자신도 한 몫 거들고 싶었나 보다.
약간은 멋적어 하면서도 목청껏 소리를 지르더니 한다는 말이 ”엄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 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번 월드컵은 한국인들의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종의 씻김굿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는 더럽게도 운이 나쁜 민족이라는 자학, 아무리 찬란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어도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민족이라는 현실은 우리를 저 깊은 잠재의식으로부터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방언론에 비친 우리의 이미지는 또 어땠나. 데모하는 학생들과 최루탄, 노사분쟁, 개고기식당, 50여년 만에 만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아들….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부정적이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코드가 대부분이었다.
월드컵 초반만 해도 유럽 언론들의 보도 태도는 좀 삐딱했다. 다 팔렸다던 입장권이 대량 공석으로 드러난 데 대해 한일 언론은 영국의 판매대행사를 비난했지만 BBC나 CNN은 이게 다 월드컵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 개최하는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식으로 은근히 아시아에 대한 비하의식을 드러냈었다.
월드컵은 아무래도 유럽국가들의 잔치인데 머나먼 극동에서 열리니 누가 보러 가겠느냐는 투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한 게임 한 게임 선전 끝에 나란히 16강에 오르자 부정적인 시선은 찬사로 바뀌었다.
박세리가 4년 전 맥도날드컵으로 첫 우승을 따내고 이어 US 여자오픈컵마저 거머쥔 뒤 한 달도 못 돼 총 네 번의 승리를 거뒀을 때 미국 언론이 보여준 극적인 변화는 참 재미있었다.
처음엔 ‘버벅대는 영어’ ‘갱 출신의 아버지’ 등의 표현이 보이다가 승리가 거듭될수록 ‘여자 타이거우드’ ‘한국의 영웅’ 등 칭찬 일변도로 변해 갔다.
확실한 실력 앞에서는 그 어떤 우월의식도 자리잡을 곳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준 통쾌함으로 기억하고 있다.
박세리, 박찬호 등이 앞장선 한국인들의 스포츠를 통한 긍정적 자아 찾기 여정은 이번 월드컵에서 황선홍, 유상철, 안정환 등 23인의 태극전사들과 함께 멋지게 마무리 된 느낌이다.
4강을 바라보는 세계축구의 주역으로 성큼 커버린 한국 축구대표팀, 그들이 히딩크감독과 함께 연출한 거대한 씻김굿, 이를 통해 깨끗이 아물어 버린듯한 우리 영혼의 상처들…
목청껏 소리지르던 아이와 함께 나도 모르게 “이젠 여한도 없어”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결승 가면 좋지, 안 그래?”
/ 이덕규ㆍ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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